
1859년 봄, 한가한 일요일 오후에 워싱턴 백악관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공원(Lafayette Park)에서 총성이 들립니다.
총을 든 가해자는 연방 하원의원 다니엘 시클스(Daniel Sickles).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은 연방 검사이자 미국 국가 작사자인 프랜시스 스콧 키의 아들, 필립 키(Philip Barton Key)였습니다.
시클스 의원은 키 검사의 복부, 가슴과 머리를 겨냥해 연달아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공원에 있다 살인 사건을 목격한 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키 검사를 인근 건물로 옮겼지만, 곧 사망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상황을 증언해줄 목격자가 최소 12명이나 있었으며, 시클스는 범행 직후 집에 들른 다음 자수를 했습니다.
다니엘 시클스 Daniel Edgar Sickles (1819~1914)
살인의 동기는 불륜이었지요. 시클스의 아내 테레사는 젊고 매력있으며 이태리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재원이었습니다.
1852년 33세의 시클스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테레사를 임신시켜 결혼에 성공했는데요. 바람기가 있던 남자인지라 젊은 아내를 두고서도 이리저리 애인을 만들어 스캔들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시클스는 당시 유명한 창녀였던 패니 화이트(Fanny White)와의 스캔들로 뉴욕주 의회로부터 경고를 받고도 태연하였으나, 자신의 바람기에 속앓이를 하던 아내가 친구인 키 검사와 몰래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격노했습니다.
시클스는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였던 키 검사에게 테레사를 사교 모임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는데요. 40대 후반의 홀아비였던 키 검사는 똑똑하고 매력적인 20대 초반의 테레사에게 홀딱 반하고 맙니다. 한눈만 파는 남편에게 지쳐있던 테레사도 키 검사의 자상함에 의지하게 되었고요.
필립 키 Philip Barton Key(1818~1859)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자, 키 검사는 아예 시클스의 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 하루에도 몇번씩 테레사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워싱턴 사교계에서 시클스는 "남편만 모른다"는 이야기로 웃음거리가 되었지요.
결국, 시클스는 "키 검사는 당신보다 당신 아내와 더 가까운 사이요.."라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서야 둘 사이를 알게 됐습니다.
남편이 길길이 날뛰자, 테레사는 순순히 관계를 실토하고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시클스는 아내에게 반성문 겸 자술서를 쓰게 하고, 서재에서 밤새 통곡을 했다는군요.
그리고 다음 날, 아무 것도 모르는 키 검사가 테레사를 데리러 오자, 권총 두 자루를 집어들고 그를 쫓아 나갔던 것입니다.
시클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면서, 그의 살인은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워싱턴 주류 사회 전체가 시클스를 칭찬하고 옹호하는 분위기였는데요.
테레사 시클스 Teresa Bagioli Sickles(1836~1867)
수많은 상하원 의원들을 비롯한 워싱턴 고위층 인사들이 시클스를 격려하러 오는 바람에 간수장의 사무실을 응접실로 내줘야 했다고 합니다.
언론들은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연일 보도를 했고, 뷰캐넌(Buchanan) 대통령도 그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정도였습니다.
3주간에 걸친 살인 재판에는 방청객이 빽빽이 들어차 법정 창문과 나무에 매달려 구경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시클스의 변호팀은 그가 아내와 친구의 배신에 격분한 나머지 일시적 정신이상(temporary insanity)을 일으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신의 아내와 친구였다면, 당신 역시 총을 빼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란 변호사의 말에 배심원들(당시에는 모두 남성이었지요)은 전적으로 동의, 심의 한 시간 만에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시클스 사건은 일시적 정신착란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미국 법정 최초의 케이스로 기록되었지요.
테레사가 작성한 고백서 겸 반성문. 시클스가 무죄판결을 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퍼 위클리 매거진은 이 고백서를 지면에 공개해 온 워싱턴 시민들에게 알렸다.
워싱턴 사교계는 그의 무죄 석방 소식을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시내 곳곳에서 시클스를 위한 파티가 열리고 펜실베이니아 거리에서는 해병 군악대가 축하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 곳곳에서 "시클스 만세!"를 외쳤으며, 신문들은 그가 국민적 스타가 되었으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지요.
하지만 이런 축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중은 키 검사를 죽이고 당당히 무죄판결을 받은 시클스가, 이번에는 멋지게 아내 테레사를 내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시클스 의원은, 예상보다 아내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는 바람났던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함께 잘 살아보겠다고 공개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시클스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대중은 눈깜빡할 사이에 돌아섰습니다. 이번에는 아내를 응징하라는 여론을 무시한 그를 '배신자'로 몰아가기 시작했지요.
신문들은 "몸을 더럽힌 아내를 다시 맞이하다니 그는 역적이다"라는 악의적 기사를 썼습니다. 이렇게 여론의 화살을 받게 되자, 시클스는 의회에서도 외면을 받아 기피 대상으로 취급되었지요.
한 사건 때문에 하루 아침에 영웅과 배신자를 오가다니, 참 극적인 시대의 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 중 다리를 잃은 다니엘 시클스(中)
그 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시클스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군 육군 소장으로 활약하다 오른쪽 다리를 잃었으며 이를 평생 자랑으로 삼았지요.
전쟁 후 스페인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이후 다시 선거에 출마해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외교관 시절에는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2세와 연인 관계라는 소문도 돌았다고 하네요.
아내 테레사는 1867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 4년 뒤 재혼한 시클스는 그 후로도 여러 정부를 두어 사교계 가십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95세까지 장수를 누리다 1914년 5월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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