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움과 재능,용기,도전정신,뛰어난 패션감각 등을 두루 갖추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여성.
1920년대 미국에서 여류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지금 한국에서 김연아 선수가 그러하듯, 폭발적인 대중적 관심과 사랑을 받던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녀는 1928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남성 조종사들과 함께 대서양 횡단비행을 하였고, 1932년에는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 1935년 하와이주~태평양 비행에 성공하면서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가장 빠른 대서양 횡단비행, 여성 조종사 최초의 대서양 횡단비행 등의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리기도 했지요.
대서양 횡단 성공 후 미 전역을 누비며 강연을 했고, 후버 대통령과 미 의회의 칭송을 받았으며, 여성 최초로 공군 수훈십자훈장 수상, 여성 최초 국립지리학회 금장 메달 수상, 교황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의 초청을 받는 등 에어하트의 이력은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Amelia Earhart(1897~1937)
항공 산업 태동기였던 당시에는 다양한 시범 비행이 대중에게 최고의 오락거리로 제공되곤 했습니다. 1927년 33시간30분의 비행 끝에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한 찰스 린드버그는 세계적인 영웅으로 기록되었지요.
하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대서양 횡단에 다섯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지만, 당시에는 15~20시간이 걸렸습니다.
조종사들은 허술한 창문으로 지도가 날아가 길을 잃기도 하고, 비행기 날개가 떨어져 다시 이어붙이고 날곤 했습니다. 비행기의 성능도 안정적이지 못했고 항법 기술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니까요. 1927년 한 해에만 19명의 조종사가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을 정도였습니다.
터프하고 힘든 비행사는 당연히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때에 상큼한 미소를 가진 늘씬한 여성이 나타나 수많은 여성 최초,사상 최초 기록을 세우자,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미국 대중들은 아멜리아에게서 희망의 꿈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수천만의 환영 인파가 몰렸으며, 당시 수많은 어머니들이 딸에게 아멜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아름답고 강인하게 자라길 기원했다고 합니다.
1897년 7월24일 캔자스주 애치슨 출생.
1917년, 20살의 에어하트는 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보고 간호학교를 나와 군병원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뒤에는 의대에 진학하고 싶어했으나, 부모의 부름을 받고 로스앤젤레스의 가족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920년, 아멜리아는 캘리포니아 항공대회 비행쇼를 구경하게 되지요.
굉음을 내며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그 순간 일생의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곧장 키너 비행장에서 비행 교육을 받기 시작, 1923년 5월 국제항공연합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여성 최초로 고도 1만4000피트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아멜리아는 미국 이민자를 후원하는 사회사업 기관인 데니슨 하우스에서 사회 사업가로 일하며 여성 조종사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1928년 4월 27일 그녀의 인생을 바꿀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대서양 횡단 비행을 계획하고 있던 힐턴 레일리 공군 대위가 아멜리아에게 참여하라는 제안을 해온 것이지요.
대위는 언론에 '촉망받는 여성 비행사'로 소개되던 아멜리아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두 남성 비행사와 함께 아멜리아는 곧바로 비행 훈련에 돌입했고, 1928년 6월17일 대서양 횡단 비행에 나서게 됩니다.

이 비행 덕분에 그녀는 최고의 비행사로 도약할 기회와 함께, 든든한 동반자를 만날 기회도 얻었습니다.
비행의 후원자였던 출판업자 조지 퍼트넘(George P. Putnam)은 아멜리아에게 대서양 횡단 경험을 다룬 책을 쓰라고 권유했고, 그녀의 책 <20시간 40분(대서양 횡단에 걸린 시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성공으로 곳곳에서 강연 초청을 받게 되자, 조지는 아멜리아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됩니다. 1931년 2월7일 두 사람은 결혼을 했지요.
조지 퍼트넘은 아내에게 위험한 일 그만두고 자신과 집에 머물자고 조르는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멜리아가 더 높이 날아오르도록 격려하고 후원하고 뒤에서 자랑스러워하는 남자였지요.
1932년 5월20일, 아멜리아는 조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을 시도합니다. 고도계 고장과 엔진 파손 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열다섯 시간여를 비행, 마침내 북아일랜드에 착륙한 아멜리아는 여성으로서는 최장비행 기록, 최단시간 내 횡단기록 등을 갱신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환영인파에 둘러싸인 아밀리아
후버 대통령 부처에게 상을 받고 있는 아밀리아. 그녀 바로 뒤쪽에 남편 조지 퍼트넘의 모습이 보인다.
뒤이어 1935년 하와이~캘리포니아~워싱턴을 잇는 태평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아멜리아는 더 큰 꿈을 꾸게 됩니다. 항상 소망해온 세계일주비행을 시도하려는 것이었죠.
워낙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라 단독 비행을 고수하던 아멜리아지만 항법사 프레드 누난(Fred J.Noonan)과 함께 하기로 합니다. 1937년 6월1일 아멜리아의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Lockheed Electra)가 마이애미를 출발합니다.
언제나처럼 조지는 그녀에게 무사히 돌아오라 인사를 했지요. 그러나, 아멜리아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뉴기니를 거쳐 하우랜드섬으로 향하던 7월2일 오전, "하우랜드 섬 상공에 있다. 연료가 떨어져간다. 라디오 교신을 들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아멜리아와 비행기는 사라졌습니다. 교신은 끊어졌고, 록히드 엘렉트라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937년 6월,비행을 앞두고 작별 인사를 하는 아멜리아와 조지. 이것이 마지막 악수가 될 것이라고는 두 사람 모두 생각지도 않았으리라.
 아멜리아를 싣고 사라진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
세계일주 성공 소식을 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보도진은 아연실색했습니다. 아멜리아의 비행은 단순히 항공계의 이벤트가 아니라, 미국민 모두의 꿈이었으니까요.
실종 소식을 전달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9대의 해군 군함과 66대의 비행기를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파편이나 유류품 하나 발견하지 못한 채, 7월18일 구조대는 추락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해산됩니다. 그리고 1939년 캘리포니아 법정은 아멜리아의 법적인 사망을 선언합니다.
결국 홀로 아멜리아 수색을 시도하던 남편 조지는 그녀가 비행 정착지에서 보내온 편지들은 모아 <마지막 비행>이라는 책을 내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깜쪽같이 사라진 아멜리아와 항법사 프레드 누난
 아멜리아를 후원하는 비행팀. 오른쪽 끝이 프레드 누난
감쪽같이 사라진 그녀에 대해 수많은 '음모이론'이 제기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시체는 커녕 비행기 파편 하나 발견을 못했다는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지요.
음모론자들은 ^그녀가 지나친 유명세에 염증을 느껴 일부러 실종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녀에게 일본군 정찰을 부탁했는데, 일본군에 적발된 그녀는 처형됐다, ^미국 스파이로 나치에 생포됐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갔다 등등 다양한 '설'을 만들어왔습니다.
실종 당시 그녀의 구조 신호를 들었다는 민간인들이 줄을 서고, 변장한 그녀를 미국 공항에서 목격했다는 제보도 잇따랐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아멜리아의 실종을 '미국 최대의 미스터리'중 하나로 보도하는 것을 보면, 그녀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아직도 식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멜리아의 실종 의혹을 다룬 방송의 일부: Where's Amelia Earhart?
 대중 앞에서 연설 중인 아멜리아 에어하트, 말솜씨 또한 뛰어나 명강사로 미국 전역에 초청되곤 했다.
 보이시하면서 세련된 아멜리아의 '항공 패션'은 당시 여성들에게 화제가 되곤 했다.
 아멜리아에게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패션촬영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테니스 라켓을 든 뒷모습.
남자들도 두려워하는 위험한 비행에 과감하게 나서는 용기, 그것도 서른 한 살의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첫 대서양 횡단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특히 그 시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오는 세련된 스타일과 호감가는 외모도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그녀를 동경하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이유지요.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1976년(NBC의 TV용 3시간짜리 전기 드라마)과 1994년 제작된 바 있습니다. 국내에 <창공의 여왕(원제: Amelia Earhart,The Final Flight, 감독 Yves Simoneau)>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94년 작에서는 다이앤 키튼이 아멜리아 역을 맡았었지요.
오는 10월에는 또하나의 아멜리아 에어하트 영화 가 개봉된다네요. <몬순 웨딩>, <베니티 페어>를 만든 인도 출신 여성감독 미라 네어(Mira Nair)가 메가폰을 잡고, 힐러리 스웽크, 리처드 기어,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합니다.
1976년 TV 전기영화에서 아멜리아역을 맡은 수잔 클럭(Susan Clark)
다이앤 키튼 주연의 <창공의 여왕(1994)> 포스터
왼쪽이 아멜리아 에어하트, 오른쪽이 힐러리 스웽크
그런데, 저는 힐러리 스웽크(Hilary Swank)가 아멜리아를 맡는 것이 그다지 적절한 캐스팅같지가 않네요.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고 프로페셔널할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을 제외하면, 스웽크는 아멜리아와는 꽤 다른 느낌이어서요.
스웽크는 너무 선이 굵고 강한 인상입니다. 귀여운 데가 전혀 없는 얼굴이죠.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매력은 사진에서처럼 보이시한듯 하면서도 여리고 섬세한 선을 가졌다는 것인데...
여튼, 힐러리 스웽크가 전설로 남은 여류 비행사의 모습을 잘 투영해줄런지, 연기력에 기대를 해보기로 하지요.

아멜리아 에어하트 공식 사이트 http://www.ameliaearhart.com/
관련 기사 http://www.foxnews.com/story/0,2933,263087,00.html http://www.yoursdaily.com/women/amelia_earhart_cold_case_for_a_hot_lady 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1557448/Is-this-Earharts-final-landing-site.html http://www.janesoceania.com/oceania_amelia_earhart/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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