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이야 공룡이 인간보다 먼저 지구상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만, 이 거대한 파충류의 존재가 공인되고 '공룡(Dinosaurs)'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1842년으로,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보다 30년 앞선 시기에 한 십대 초반의 소녀가 거대한 어룡 이크티오사우루스의 화석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11~12세에 불과했던 소녀와 두 살위의 오빠가 함께 발견한 이 화석은 당시에 '거대 물고기의 뼈'정도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엄청난 발견이었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로 여겨져 잠깐 흥미를 끌었을 뿐, 당시에는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요. 하지만, '물고기 뼈'를 발견한 어린 소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게 됩니다.
제대로된 장비도, 대학 교육이나 든든한 후원도 없이 이크티오사우루스(Ichthyosaurus),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 테로닥틸(Pterodactyl, 익수룡)의 화석을 발굴하여 공룡 발전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난한 소녀, 매리 애닝(Mary Anning 1799~1847)의 이야기입니다.
매리 애닝(Mary Anning 1799~1847). 그녀 발치 오른쪽의 개는 화석채집을 함께 한 유일한 '동료'였다. 이 충직한 친구는 매리가 묻혀있는 화석을 발견하고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이, 언덕이 무너져 내리면서 죽었다. 매리는 오랫동안 이 개를 그리워했다.
영국 남서부 해안 지방, 라임 레지스(Lyme Regis)에서 태어난 매리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해안가로 나가 화석을 모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쥬라기 시대 화석이 발견된다는 이 지역 해안에는 온갖 기괴한 생물들의 뼈가 묻혀있었지요.
캐비넷을 만들어 팔던 매리의 아버지 리처드는 장사가 잘 되지 않자, 해변에서 모은 화석을 팔아 부수입을 올리곤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화석에 고통을 치유하는 마법적 힘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으며, 부자 수집가들이 독특한 돌을 구입하러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리처드는 매리를 데리고 다니며 바늘과 작은 브러쉬로 화석을 닦고 광을 내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가 1807년 화석을 채집하다 절벽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병석에 눕게 되자(1810년 사망), 매리는 아버지 대신 화석을 주으러 다니게 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리처드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120파운드의 빚을 남겼습니다. 가족이 1년 동안 벌어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었지요. 열살 소녀였던 매리는 작은 화석들을 손질해 부인들에게 팔아 어머니에게 줄 음식물을 사오곤 했습니다.
1811년, 두 살위의 오빠 죠셉이 해안 바위 위에서 이상하게 생긴 화석을 발견합니다. 4 피트 길이의 파편이었지요. 그 크기와 기괴함에 매료된 매리는 이 화석의 나머지 부분들을 자신이 찾아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거의 1년이 걸려 결국 온전한 모양의 뼈를 모두 모으게 되지요.
 매리가 최초로 발견한 화석의 주인공-어룡 이크티오사우루스(Ichthyosaurus)
이 화석은 귀족 집안에 팔려 런던의 박물관에 전시됩니다. 매리와 조셉은 보수로 23파운드를 받았지요. 이후 매리는 '화석 소녀'로 불리며 학자들의 화석 탐사에 가이드 역할을 하고 지질학 서적을 독학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돈벌이를 넘어 스스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후로도 매리는 두 점의 이크티오사우루스 화석을 더 발견하고, 처음으로 거의 온전하게 보존된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와 디모르포돈(Dimorphodon) 화석을 발견합니다. 그녀의 화석들은 박물관이나 수집가의 손에 팔려가지만, 매리는 발견자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전시물에도 발견자로서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요.
매리는 종종 "여자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고 푸념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가난한 젊은 여성이 아니었다면, 화석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었지요.
1823년이 되어서야, 한 작가 겸 수집가가 지역 선문에서 매리의 자질을 칭찬하는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지질학 잡지나 학술회에서 매리의 이름이 언급되곤 했지만, "거 참 기특한 아가씨"정도의 대접을 받는 정도였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교육도 받지 않은 하층계급의 젊은 여성이 이런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지요.
하지만, 매리는 책을 읽으며 독학으로 학식을 쌓아갑니다. 1824년 매리를 만난 한 귀족 부인은 그녀의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 .그녀는 발견한 모든 뼈들이 어떤 종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대신, 신의 축복을 받았다. 혼자 책을 읽으며 쌓은 지식은 왠만한 대학 교수들에 뒤지지 않으며 어떤 유식한 남성과도 지질학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다...."
 매리 애닝이 발견한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 화석
매리는 진화론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홀로 화석을 분석하며 진화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연구했을 정도로 명석한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진화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학자들은 그녀를 '인정'하기보다 '이용'했습니다. 매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학자들이 찾아와 내 뇌에서 화석에 대한 지식을 끄집어내고는, 자신들의 논문에 내 아이디어들을 발표하곤 한다"고 불평하곤 했지요.
고고학,지질학에 대한 토론에 목말라 있던 매리는 누구던 화석에 대해 물어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발견을 열심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이를 적어가서 마치 자신의 발견인양 발표했던 학자들은, 물론 매리에게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죠.
모시고 살던 어머니가 1842년 사망하자, 매리는 홀로 집을 지키며 화석 연구를 계속합니다. 1847년 9월 유방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오직 화석 발굴과 연구에만 매달렸지요.
그녀가 사망하기 몇달 전에야, 매리는 지질학회(the Geological Society) 명예 회원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이 배려도 그녀의 오랜 지인이었던 헨리경이 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매리가 평생을 보내며 화석 연구에 몰두했던 Lyme Regis 지역의 해안.
자신이 발견한 화석을 '학자'들이 분석하고, 자신이 설명한 내용을 그들의 논문에 수록해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매리는 연구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명예도 돈도 아닌(그녀는 평생 가난했습니다), 오로지 학문에 대한 열정만으로 화석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이후 공룡의 존재가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매리의 발굴과 연구가 공룡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정식 화석학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녀가 사망하고 50여년 뒤, 테리 설리반(Terry Sullivan)이 매리를 기리며 짧은 노래를 만드는데요. 어려운 영어 발음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지요.
She sells sea-shells on the sea-shore, The shells she sells are sea-shells, I'm surer For if she sells sea-shells on the sea-shore Then I'm sure she sells sea-shore shells.

어린 나이에 최초의 어룡을 발견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매리 애닝의 이야기는 동화로 꾸며져 어린이들에게 읽혀지곤 합니다.이런 동화들은 대부분 "어린이 여러분도 매리처럼 탐구하고 관찰하는 과학자로 자라세요"라는 분위기로 꾸며지는데요.
여성이며 가난한 집안 출신이란 이유로 매리가 생전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제게는 다소 서글프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사후에 인정을 받고 이름을 알리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겠지만, 그 영광과 즐거움은 후대 사람들의 몫일 뿐이니까요. 21세기의 소녀들이 과학자로서 매리 애닝을 동경하더라도, 19세기 그녀가 겪은 사회적 차별과 좌절은 결코 위로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박물관으로 꾸며진 매리 애닝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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