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평 컨테이너 살지만, 마음은 떳떳하고 기뻐요"
 재작년인가요,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겨울점퍼'를 10년 넘게 입고 있다고 해서 그 청렴함에 중국 전역이 감동했는데요. 우리 조선시대에도 검소하고 청렴한 청백리를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쳤죠.
병조판서를 지낸 이율곡의 집에는 장례를 치를 식량이 없었구요, 서해 유성룡은 퇴직해서 낙향하니까 양식거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엔 이분을 '현대판 청백리'라 부르고 있는데요. 박영록 前의원이 그렇습니다.
강원도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4번이나 한, 야당 부총재까지 지냈던 그분은 지금 서울 삼선동 3.8평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습니다.
헌정회에서 주는 월급도, 여기저기서 주는 상금과 성금도 정치운동과 사회에 헌납하고, 넓은 집을 제공하겠다던 분들의 성의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서울 도심에 3.8평의 땅이 있으니 노숙자들에 비하면 큰 축복을 받은 셈이지요"라고 말하는 박영록 前의원을 1월 9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살던 집 공매처분 당하고, 지금은 3.8평 컨테이너에서 생활 ▶ 지난 12월 28일에 황희문화예술진흥회로부터 '황희정승대상'을 받으셨어요. 아무나 받는 상은 아닌 것 같은데,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원래 무능하고 부덕한 사람이기 때문에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정치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공을 세운 일도 없고 오히려 누를 많이 끼친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 시상을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과연 내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서 거절을 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상을 저에게 주는 것은 저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하는 사람들,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밑으로는 면장에 이르기까지, 또,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구의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공직자가 황희정승과 같은 깨끗한 정신으로 국정에 임해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저에게 강력히 실천하라고 하는 그야말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늘이 내리는 그런 천명이라고 생각을 하고 감히 받기로 했습니다.
▶ 지난 해 7월, '대한민국 청렴정치인대상'도 받으셨어요.
'오른손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도 있듯이, 제가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당연히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 사명을 다했을 뿐이지 그것이 무슨 상을 받을만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 늘 망설이고 했던 것이다.
▶ 안동 시민들이 1억 원을 모아서 상금으로 드린 일도 참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저 개인에게 상을 준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가 어떻게 보면 그런 일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모든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간다는 얘기가 있고, 현실이 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를 깨끗이 해야 한다고 하는, 민심이 천심이니까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이 내리는 하늘의 명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앞으로 정신을 받들어서 청렴정치 실천을 위해서 남은 여생을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기여해보자는 생각으로 받게 되었다.
▶ 국회의원도 4번이나 하셨고, 현재는 범민족 화합통일운동본부 총재로 계시기도 하신데, TV에 소개된 모습을 보면 사모님과 함께 컨테이너에서 사신다고 하던데요. 그 곳에 기거하신 것이 언제부터인가요? 2002년부터니까 이제 6년째가 되네요.
▶ 컨테이너라고 하면 3.8평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공간인데요.
개인생활을 공개하는 것이 참 죄송합니다만, 사실인즉 제가 성북구 삼선동 서민주택에서 4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정치는 그만 두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문제라든가 문화와 뿌리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염려를 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야겠다 생각해서 민족사회단체 총연합회를 만들고 했는데, 사무실도 좀 내야 되겠고, 사무실을 내려면 보증금도 있어야 하니까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아서 보증금을 마련했죠. 그래서 사무실을 얻었는데 비용도 제대로 못 내다보니 건물 주인이 공매처분을 신청해서 그 집이 1억1천7백만 원에 공매처분을 당했죠. 그 정도 금액이니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죠. 그래서 또 어디 집을 구하려하니 구할 수도 없고 해서 바로 그 앞에 3평 8폭 정도 자그마한 땅이 별도로 있었던 것이 있었어요. 제가 거기에 컨테이너를 놓고 살게 된 것입니다.
▶ 컨테이너라도 가구도 들여놓고 해야 하잖습니까? 가구들이 공매처분 때 전부 차압당하고 해서 모든 물건이 없어지고 풍비박산이 됐죠.
▶ 요즘 같은 겨울에 컨테이너에서 사시려면 난방 문제도 걱정이겠어요.
그럼요. 여름에는 40도 이상 올라가고, 겨울에는 안에 있는 물이 얼 정도예요. 그렇지만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다보니 노변의 잡초같이 오히려 짓밟히고 하면 그 야생이 강해서 잘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온실 속에서 자라는 화목처럼 나약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이 경험을 통해서 보면 건강에 손해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전기 들어온 것도 얼마 안 된다면서요. 그럼 그 전에는 촛불생활 하신 거예요? 예. 야당을 하다보니, 야당으로서 지조를 지키고 끝까지 옳은 일을 하려고 불의와 타협을 안 하다보면 정치계에서도 여당에게만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야당 같은 동지들에게도 왕따를 당하고 그런 정치가 지금 우리나라 정치풍토예요. 내가 강원도 지사할 때 도보 출근, 도시락 지참 같은 것을 해서 새로운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를 조성하려고 한다 해서 40대 기수론이 나오고 할 때 외국에서는 장개석이나 원자바오 같은 분들이 나한테 와서 묻기도 하고 했거든요. 그래서 '동양의 청백리'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은 다 그 나라에서 존경을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게 생활을 하게 되면 같은 정치계에서도 '오죽 못났으면 저렇게 하나' 하면서 괜히 위선으로 혼자 그렇게 해서 국민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혼자 뿔난 짓을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고생하고, 국가의 권력을 써서 돈도 좀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만들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 그래도 좀 '융통성'이라는 것을 얘기하다. 선생님께는 그 융통성도 필요없는 건가요? 저는요. 융통성을 갖다보면 결과적으로는 뭐가 뭔지 모르는 결과가 와요. 융통성이라는 것이 융통성이 아니라 그저 불의와 타협을 하는 것이죠. 특히 야당 오래 하는 사람들은 여당의 어떤 부당한 일이라든가 하는 것을 끝까지 파헤치고 나가야 하는데, 지금은 안 그런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러지 말라고 포섭을 하려고 하다가 안 되면 돈 주고, 이권주고 해서 회유를 하는 거죠. 낮에는 왕왕대고 여당을 욕하는 것처럼 하지만, 밤에는 또 같이 여당이 되어서 그러는 거죠. 정치라는 것이 말이죠. 정치를 하려고 하지만 돈을 벌려고 하면 또 벌수 있죠. 또 아주 가난해지는 것은 당연히 가난해지는 거고요.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교, 불교, 기독교 다 국민 숫자의 99%를 차지하고 있고, 정치인들도 다 유교, 불교, 기독교거든요. 어느 사람하나 교인이 아닌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볼 때 이런 분들, 정치인의 최고 덕목이 뭔가 하면 하늘을 우러러 땅에 엎드려서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며 하늘과 내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광명정대한 청렴정치를 실천한다는 것을 천지신명 앞에 아주 맹약을 하고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정치인인데, 이 정치인들이 최고 덕목을 지키지 않고 딴 짓을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정치가 발전할 리가 없죠. 우리가 생각할 때 대통령을 했다는 사람들이 몇 천 억을 비자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자리가 백성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하는 자리인데 그 자리를 이용해서 설마 그 분들이 막대한 돈을 축재해서 외국에 보내고 했겠는가, 저로서는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단 말이죠.그래서 저는 지금 와서 생각하는 것은 그 양반들을 만나서 이런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들 한 두 번은 주의를 주고, 주의를 줘서도 안 들으면 끝내 국민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종교단체에서 옛날처럼 종교의 명예를 위해서도 파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종교인이 그런 짓들을 하느냐 말이죠. 하다못해 선거 때 이런 사람들은 당선시킬 수가 없다 하는 식으로 좀 해서 아주 어른 노릇을 단단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30대에 초대 민선 강원도 지사로 당선되면서 정치 입문 ▶ 청렴한 생활을 초대 민선 강원도 지사 시절부터 실천하셨다고 하는데요. 강원도 지사를 지내신 때가 언제셨죠? 그 때가 1961년도였습니다.
▶ 그 때 관용차도 안 타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셨다고요? 그 당시에 군용차에 올라가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고 4.19혁명이 일어났죠. 4.19혁명 이후에 지사로 출마를 했죠. 그 때는 장관 지낸 사람들이 지사를 많이 했는데, 서른일곱 살 된 청년이 지사를 나가니까 강원도는 보수적인 곳인데 누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나왔다'해서 상대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다행히 그 때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마흔셋에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어요.
미국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인데, 세계 대통령을 마흔 세 살짜리가 하는데, 이 조그마한 강원도에서 서른일곱 살 짜리라고 해서 못할 이유가 없다, 능히 이끌어갈 능력이 있으니 나에게 표를 던져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 해서 그렇게 당선이 되었죠. 순전히 학생 데모하던 기분으로 도지사가 된 거죠. 그런데 가보니까 강원도는 또 그 때 이승만 대통령 때 여당 지지세력이 많은 곳이거든요. 그래서 강원도가 표를 많이 찍어서 자유당이 유지가 될 때예요. 그러니까 아주 강원도는 지사라도 자동차가 네 대씩이나 있고 장관보다 더 좋은 것을 주고요. 점심때면 관용차니 군용차들 세워놓고 먹고, 아주 관기가 문란할 때였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곳을 가서 4.19 정신을 이어가려고 하니 그 제도에 만족하고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가 취임하면서부터 걸어 다녔어요. 정치를 해보면 정치같이 쉽고 간단한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뭔가하면 자기는 안 하고 밑에 사람만 시켜서는 잘 안 되고, 자기 스스로 하면 공무원들은 다 따라서 하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아침에 출근을 할 때 걸어가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경찰국장이든 내무국장이든 지사가 걸어가는데 그 앞을 차타고 지나갈 수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다 걸어 다니게 되는 거예요. 관용차를 전부 도청 차고에 두고 출퇴근을 걸어서 했죠. 춘천 같은 곳은 20분이면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까요. 관용차를 타지 말고 도보로 다니라는 말 한 마디 안 해도 사흘 지나니까 도청의 전 간부가 걸어서 출퇴근을 하게 된 거예요.
▶ 원래 고향이 강원도셨나요? 제 고향이 설악산과 금강산 사이에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고성'이죠.
▶ 어린 시절, 부모님들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외아들이면 정말 ‘금지옥엽’이었죠. 그런데도 학교를 못 가게 했어요. 왜냐하면 '일본글을 배우면 우리 민족의 혼을 뺏어간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족보를 뺏어갔으니 우리 민족의 족보를 찾아 오거라, 그러니 학교에 가지 말고 서당에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농산물을 속초 시장에 가져다 팔아서 돈을 만들어 주셔서 그 돈을 가지고 가출하다시피 해서 춘천에 가서 공부를 했죠.
▶ 그래서 춘천농고를 졸업하시고, 강원일보 기자 생활을 하셨어요. 그 때 전설을 남기신 것이 진해 별장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단독으로 인터뷰 하셨어요.
그 때 진해에서 이승만과 장개석이 만났는데, 갑작스레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쭉 기다리다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서, 그 때 제가 그 사진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준 일이 있었어요.
▶ 그러면 정치 입문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되신 건가요? 신문기자를 하다가 우연찮게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어요. 지방에서는 그 당시 시의원을 뽑았는데요. 제가 원주에서 기자단장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죠.
▶ 그러고 보면 야망도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때 국회의원을 한다는 야망은 없었고, 그저 시나 쓰고 문학소년이나 한 번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는데, 자연히 어떻게 국회의원이라는 자리에 가게 된 거죠.
▶ 그럼 초선은 어디서 되신 건가요? 원주에서 시의원을 했었죠. 그 후에 국회로 진출했고요.
▶ 초선 의원 때, 1970년 독일 베를린 스타디움에 새겨진 손기정 선수의 일본국적을 끌과 정으로 우리 한국으로 바꾸신 그 장본인이시잖아요.
그 때 거기를 가서 보니까 손기정 선수가 일본사람으로 적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올림픽 위원회에서 행사 때마다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보내는 초청장을 보면, "손기정(일본인)" 이렇게 돼서 오는 거예요.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우리 민족 한 사람이라도 나라가 뺏긴 것이나 한 사람의 인권이 뺏긴 것이나 다 같은 것인데, 왜 우리 손기정을 일본 사람으로 하느냐 해서 국적을 고치고, IOC 위원장에게 가서 “IOC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 IOC 자체가 세계 평화를 유린하고 우리 민족을 잡아다가 일본 사람으로 만들어서 여기에 비석을 세운 것을 인정하는데, IOC 위원회가 뭘 하는 겁니까? 바꾸자.”라고 했죠. 그래서 한국의 IOC 위원장이 나와서 제안 설명을 하고 IOC위원이 전부 바꾸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본의 아오키 IOC위원과도 만나서 상의를 했더니 "우리 일본도 참 그런 못된 역사를 후손에게 남겨 줄 수 없으니, 한국에서 제안 설명을 하면 우리도 동의를 해주겠다"라고 했죠.
그래서 그 때 우리나라 장기영 IOC위원이 저를 끌어안고 "박의원님, 참 장한 일 하셨습니다. 제가 IOC 위원으로서 시정하겠다"라고 약속해 준 것이죠. 그런데 그 분이 대통령께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대통령이 "야당 사람이 불법으로 그렇게 외국에 가서 한 것을 우리 정부가 뒷받침을 해주냐? 그 사람은 역사에 남을지 몰라도 우리는 야당하는 불법한 사람 뒤치다꺼리만 하느냐?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발자취 그대로 두어야 해. 그러니까 다시 일본으로 고친다고 하면 동의하고, 고칠 필요 없어"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1개월 만에 다시 손으로 만들어 놨죠. 그래서 지금 현재 일본의 역사책에서도 이것을 다 고쳐요.
지금 우리 IOC위원들이 나서서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데, 우리 위원들이 이것을 안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 살아생전에 국민 궐기대회를 열어서 여기서 대표를 뽑아서 IOC위원회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고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일본이 심기불편 해져서 일본과의 경제관계, 협력관계가 좋지 않으니 일부러 건드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그냥 무시해 버려요.
▶ 그 때 손기정 선생님도 생존해 계셨을 텐데, 뭐라고 하셨어요? 독일에서 돌아와서 김포공항에 들어올 때 손기정 선수가 와서 자기를 한국 사람으로 다시 낳아주게끔 한 정도로 고마워했죠. 그래서 같이 국립묘지도 참배하고 했는데, 그 분 생전에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 그러니까 초청장도 그런 식으로 보내면 난 안가겠다 하는 식으로 하려고 내가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자체를 야당 박영록과 서로 교통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람을 관리했어요. 그래서 내가 동아일보 편집국에 가서 "내가 손기정 씨를 모시고 올테니, 그 사람이 죽기 전에 한국인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우리가 역사를 바로 잡자"라고 하기 위해서 손기정 씨를 모시고 가려고 하니까 그 분이 말을 들어야 말이죠. 결국 그 분이 자기 입으로 고백해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하지 못했죠. 참 안타까운 역사가 있어요.
◇ 야당 정치인으로서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지만 흔들림 없었던 정치신념 ▶ 군사정권 시절에도 참 사건이 많고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는데요. 기억에 남는 일들도 많으시겠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다음에, 우리가 신민당을 할 때였는데요. 우리가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허정 과도내각이 서서 3개월 만에 민주 정부를 세우지 않았어요? 그러면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그 당시에는 최규하가 헌법 절차에 따라서 대통령직을 하게끔 되어 있는데, 군에서 장악을 했잖아요. 저는 최규하로 하여금 해야 한다고 했는데, 전두환 이 양반이 안기부장을 하고 보안사령관을 하는 것은 최규하 체제를 없애고 혁명을 하려고 하는 거다,그러니까 이것을 막자고 했었어요.
그런데 마치 최규하가 원주 사람이고, 내가 원주 사람이니까 이 최규하와 박영록이 짝짝꿍이 되어서 전국을 수습해 나가려고 한다. 그러면 정권이 어떻게 되겠는가, 안된다 해서 당시에 소위 신민당에서 저를 뺀 모든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조를 안 하고, 전두환이 모범적인 군인이니까 절대 그런 짓을 안 하고, 우리 민간에 정권을 인수할 사람이다, 이 사람을 돕자고 해서 다들 도운 거예요.
▶ 그 때 신민당에서도 그랬습니까? 혁명이라는 것은 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하는 거예요.
▶ 그 때 직책이 부총재셨죠? 그 때 김대중파, 김영삼파, 둘이었는데요. 김대중은 정치를 안 하고 제가 김대중 주류를 묶어서 했고, 김영삼 총재는 반김대중 세력을 대표했고요. 그래서 내가 혼자 하다보니 내가 야당 대표로 붙들려 간 거예요. 김영삼 씨는 그 때 가택연금을 당하고, 나를 잡아다가 김대중 내란사건에 결부를 시켜서 그 때 김대중파를 전부 없애려고 했죠. 그런데 내가 광주에 한 번도 간 일도 없으니까 김대중 사건과 관련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냥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부정축재로 몰자고 했던 거죠.
그런데 조사관들이 전부 와서 조사를 해봐도 그 때 제 제산이 6천만 원 정도 밖에는 안 되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 정치인의 나쁜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혁명을 한 것인데, 야당 대표 재산을 6천만 원 그대로 해서 내놓게 되면 혁명이 성공하겠느냐, 그러니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재산이 6천만 원이라고 하더라도 이걸 20억으로 만들라고 한 거죠. 그래서 20억으로 만들고, 그 서류에 저더러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도장을 찍게 되면, 국고에 20억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려면 20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내 개인은 죽어도 좋지만 우리 만년 가야할 정부의 신용까지 타락시킬 수는 없소.”하고 도장을 찍지 않았어요. 그래서 38일 동안 잡아다 놓고, 내 얘기도 안 듣고 자기들끼리 시나리오를 써서 내가 국고에 20억을 바친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위원회에서 재산을 정리하려고 보니까 6천만 원 밖에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서울시에 얘기를 해서 20억이라고 해서 회수한 재산을 6천만 원에 팔은 거예요. 그래서 과거사 위원회에서 조사할 일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과거의 역사를 정리한다고 하면 과거에 있던 법률 하에서 그 법을 적용해서 과거사 정리가 되겠느냐? 다시 말하면, 재산을 뺏겼으면 도둑놈한테 찾아야지, 딴 정권에 찾으려면 시효가 넘어서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럴 때 적당히 시류에 편승하며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통일민주당 막바지에 내가 총재 대행을 했었는데, 나한테 5천만 원을 주면서, 지금으로 하면 5억이죠. 대신 당을 없애고 나는 전국구 1번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 때 돈 받고 전국구 1번을 하면 정치도 계속 할 수 있었지만, 저는 그 때 국민 앞에 양심선언하고 정치를 그만두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또 잡혀가서 고생하게 되었고요.
▶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면, 또 가족들도 있다 보면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사람이 마약 같은 것을 하면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처럼 내가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를 한 번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거기에 정진하다 보니까 불고가사(不顧家事) 하게 되고, 집안에 있는 식구들도 많이 힘들게 된 것 같아요.
▶ 지금 컨테이너에서 생활하시면서 불편한 점이 많으실텐데,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하시나요? 집사람은 근처 독거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을 이용하고, 저는 될 수 있으면 아침 저녁에 지하철역을 이용하거나 근처 식당의 화장실을 이용하죠.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볼 때 ‘그것이 사실이겠느냐?’하고 다 그렇게 생각을 하죠.
▶ 4선 의원도 하시고 도지사도 하시고 정치를 위해서 애쓰셨는데, 헌정회에서 연금 같은 것이 없나요? 헌정회에서 있는 사람들 중 66%가 전부 99만원씩 지원금을 받아요. 그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64%가 되요. 그러니까 옛날에 야당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 돈에 목을 매서 살아가고, 또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살아가죠. 그러면 우리 같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오히려 창피스럽게 생각해요.
▶ 정치를 같이 했던 동지들인데, 창피해 한다고요?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믿지도 않죠. 다 위선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 헌정회 사무실에서 식사를 자주 하신다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헌정회에서 6천 원 짜리 식권을 하나씩 줘요. 그러나 토요일, 일요일은 문을 닫지만, 우리는 토요일, 일요일도 나와서 일을 봐야 해요. 그런 때는 사원식당 같은 곳을 가요. 예를 들면, 서울신문사 사원식당을 가면 3천만 줘도 아주 먹을만해요. 천 원만으로도 한 끼 식사 할 수 있는 곳도 있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지만 마음은 아주 떳떳하고 항상 기뻐요.
▶ 자제분들이 세 분이셨는데, 첫째, 둘째는 먼저 보내는 아픔도 있으셨어요.
제가 정치를 하다가 결국은 아이들 고생을 시키고, 한 녀석은 80년대에 내가 잡혀간 다음에 한 사나흘 동안 서빙고인지 안기부에 갔다 왔다고 하는데, 집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갔다온 뒤로는 말도 안 하고 말이죠. 그 때는 어디 갔다 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면 절대 말도 못하고, 말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거든요. 우리도 잡아다놓고 조사관, 군인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서빙고에 가야 정신을 차린다고 하고,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생지옥에서 살아온 거예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지를 않아요.
◇ 모든 공직자와 정치인은 황희정승의 청렴성을 본받아야 ▶ 지금 헌정회나 범민족준비위원회에서 일하시는 것이 결코 소일거리가 아니라 뜻과 목표가 있으신 것 같아요. 어떤 목표인가요? 옛날에 대조영은 군사적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영토를 찾아서 발해를 세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역사적, 문화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다 잃은 거예요. 역사도 없고 문화도 없는 그런 민족이 됐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일본 사람들이 2600년 역사를 가지고 우리 반만년 역사를 집어 삼킬 수가 없으니, 조선의 역사인 고조선 단군역사를 없애버리고 잘못된 역사를 가르쳐서 대학교수든 전부 다 우리는 고구려 역사까지는 인정하지만, 고조선 단군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지금 ‘동북공정’이라는 것도 뭔가 하면, 단군역사가 없다고 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맞다, 너희를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는 없고, 우리가 너희의 아버지, 어머니다. 고조선 단군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결국 제가 볼 때는 나라와 민족이 지금 없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뒤늦게 동북공정 문제로 박사들, 학자들, 대학교수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열고 하는데요. 제가 그런 사람들을 보고 그래요. “고구려 역사가 우리 역사라고 하려면, 고구려 역사를 낳은 부모 역사인 고조선 단군 역사가 있다고 해야 고구려 역사가 되는 것이지, 당신들 잘난 일본 글, 중국 글을 배워서 고구려를 낳은 고조선 단군 역사가 없다고 하니까 저 사람들이 ‘그 말이 맞다, 고구려를 낳아준 부모가 우리다’ 하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고구려 역사를 찾으려면 학교에서 고조선 단군 역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시험에도 내고 해야지, 그렇게 아버지, 어머니 없는 자식이 어디에 있느냐?”하고 말하는 것이죠.
▶ 선생님도 힘드시겠지만, 사모님도 참 많이 힘드실 텐데요. 여든이 넘은 사모님이 지금도 예전에 살던 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신다면서요.
아주 고생 많이 했죠. 고생 많이 한 것에 비하면 그 사람도 참 건강해요. 그래서 역시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할 일, 임무가 끝났다고 손을 놓게 되면 그 인생이 끝이 나는 것이고, 아직도 내가 할 일이 이렇게 많이 남았다, 아무도 안하니까 내가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이면 건강도 뒤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 사연을 접한 독지가분들 중에 집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분들도 계시다면서요.
그런 분들이 계셔서 강남에도 한 번 가봤는데요. 그 분들은 저에게 그 재산을 남겨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게 와서 있으라는 건데요. 그런데도 제 양심상 또 그런 곳에는 못 있겠더라고요.그래서 역시 사람은 주위 환경에 지배를 받거든요. 그런 곳에 가서 호화스럽게 지내게 되면 그건 내 본 뜻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해야죠. 다른 민족들은 사람이 생명을 다하게 되면 '죽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 민족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 옛날부터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을 써요. 돌아갔다는 것은 어디선가 왔던 원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야죠.
▶ 옛날 선비들의 이상이었던 ‘청백리’가 요즘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만, 일본만 하더라도 예전에 뇌물을 받고 그 죄책감으로 자살했다는 장관의 이야기를 보면, 받았다는 돈이 우리 돈으로 계산해보면 5억7천만 원 정도 되요. 일본돈 570만엔이다. 다른 나라 공무원들은 다 청백리를 실천하고 있어요. 미국이 그렇게 부자 나라지만, 제가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갔을 때 한국에서 돈 10만 원 짜리 선물을 가져가면, 그 값을 물어봐서 10만 원 이상이라고 하면 전부 국고에 받쳐요. 신고도 하고요. 또 일본에 내가 3개월 동안 가서 시모노세키에서 아오모리까지 일본, 중국, 한국의 동반 친선 강화를 위해서 앞으로 서양식이 아닌 동양의 세계를 건설해 나간다는 의미로 행진을 했거든요.
그런데 시모노세키에서 아오모리까지 가는 그 주변에 그렇게 아파트들을 많이 지었는데, 30평 짜리 이상을 찾아봐도 없는 거예요. 일본은 총리를 지낸 사람도 물러난 뒤에 30평 이상되는 집에서 살지 않아요. 그렇게 검소하게 살면서 그 돈을 전부 일본 경제건설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런 것에 비할 것 같으면 우리들의 생활이라는 것은 정말 엄청난 거예요. 한 사람이 100평짜리 아래, 윗층을 가지고 있고, 60평 아파트가 몇 십억 짜리이고 말이죠.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 현대판 청백리로서 부패 없는 나라를 위해 공직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황희정승이 가지고 있던 정신, 황희정승은 죽을 때 왕이 하사하신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의 원 모습인데, 그것을 우리가 실천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나라의 모든 정치하는 사람, 출마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태극기 앞에 맹세하듯이 "나 아무개는 공직생활, 정치를 하는 동안 항상 하늘을 우러러 땅에 엎드려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며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광명정대한 청렴정치를 실천할 것을 천지신명 앞에 맹약을 한다"라고 선서하고 서약서를 쓰고 정치를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전국적으로 '청렴정치실천운동 온누리본부'를 만들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가 황희정승과 같은 청렴정치를 하게끔 만들고 싶다. 그것이 꼭 좀 됐으면 좋겠어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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