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97년 전, 1912년4월10일은 운명을 알리는 시작의 날이었다. "RMS Titanic"이 침몰하기 4일 전이다.
1912년4월10일, "Titanic"(타이타닉호)의 운명은 출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4일 뒤, 14일은 타이타닉이 심야 빙산에 접촉하여 침몰, 다음날 새벽에 걸쳐 침몰한 날이다. 승원승객 1,513명(인원의 통계에는 불분명)이 희생이 되어, 당시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배는 영국의 White Star Line이 북대서양 항로용으로 계획한 3척의 여객선 가운데 2번째의 배였다. 자매선으로는 올림픽(RMS Olympic), 이후에는 병원선으로 운항된 브리타닉(HMHS Britannic, HMHS는 His Majesty Hospital Ship)이 있다. 이 세척을 통틀어 "Olympic Class"라고 불린다. 토마스 앤드루스(Thomas Andrews Jr., 본문 하단에서 추가설명)에 의해 설계되어,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있는 허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 Heavy Industries Ltd) 중공업 회사에서 건조되었다.
 "Titanic 호"(타이타닉) 관련으로 출판된 서적들
당시 세계최대의 객선이 었으며, 타이타닉의 정식명칭은 RMS Titanic(Royal Mail Ship or Steamer)이라고 불린다. 타이타닉의 조선계획은, 20세기 초두에 조선업으로 세력을 자랑하던, 허랜드 앤 울프의 회장 피리가, 1907년 런던의 메이페어의 저녁식사 때에, White Star Line의 사장 브루스 이즈메이 사장에게 대형객선 3척의 건조계획을 발표함으로 시작된다. White Star Line은 당시 치열한 경쟁을 다투고 있던 북대서양 항로에서,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 기록인 "불르 리밴드(Blue Riband) 상" 이라고 불리는 스피드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여유 있고 쾌적한 여객을 목표로 선전하고 있던 회사였다.
 White Star Line

RMS Titanic,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따라서 타이타닉도 스피드보다는 설비의 화려함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었다. 물론 안전 대책에도 만전을 다했으며, 방수구획이 설치되었다. 선체는 수면 위까지의 높이가 있는 격벽으로 16구 획으로 나누어져, 이 가운데 2구 획이 침수되어도 침몰하지 않는 구조로, 격벽은 선교(브리지)에서도 원격조작으로 즉시개폐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타이타닉은 불침선(不沈船)이라고 선전까지 되었다.
 RMS Titanic의 대서양 횡단 선전광고 실제 배의 구조는 지금 알려진 그때의 구조를 보아도 상당히 안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라는 지적도 있다. 올림픽 클래스 타이타닉에는 1년 전에 먼저 준공된 "언니 선박" 올림픽과, "동생 선박" 브리타닉(HMHS Britannic)이 존재했다. 이것은 돈이 되는 "달러 항로"였으며, 타사와의 경쟁이 심해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는 1척으로는 당해낼 수 없어서, 최저 2척을 항상 교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RMS Titanic theme song
객선 3척 가운데 처음으로써 올림픽호의 조선이 개시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2번째의 타이타닉호가, 이보다 조금 늦게 3번째의 브리타닉호가 건조되었다. 브리타닉은 타이타닉 침몰로부터 상당히 늦게 조선되어, 안전 면에서도 새롭게 크게 보완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병원 선으로 징용되어, 상선으로써 한 번도 쓰인 적 없이 침몰했다.

RMS Titanic의 설계도면
한편, 올림픽은 유송선으로써 징용되었으나, 무사히 전화를 피해 객선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1935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 은퇴한다. 타이타닉은 올림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 되었던 관계로, 커다란 계단이나 다이닝 룸의 장식, 식사의 메뉴 그리고 서비스 등, 그 외관은 물론 모든 점에서 상당히 닮았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 만이 가장 커다란 선박인 것처럼 연출되고 있었으나, 당시는 사실 올림픽이 이 부분에서는 그 대표였으며, 타이타닉, 브리타니라는 2척의 자매 선을 포함해 "올림픽 클래스"로 불렸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의 사진으로 올림픽의 사진이 쓰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좀 더 알게 쉽게 설명하자면, 타이타닉은 재탕한 홍차였으며, 당시에는 올림픽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던 존재였다.

건설중인 RMS Titanic
올림픽과의 차이점, 먼저 운항하고 있던 1번째 선박 올림픽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보완하기 위해 타이타닉의 설계는 다소 변경되어, 외관도 올림픽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들면, A 갑판(B deck)의 일등 전용 프로멘나드 덱(Promenade deck, 유보도)의 창이 전면 바다를 향해 베란더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데 반해, 타이타닉은 중앙부분에서 선수측의 전반 부분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반 실내의 구조로 되었다. 이것은 북대서양의 강풍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이 결과 타이티닉호는 올림픽호 보다 날씬한 스마트한 인상을 주어, 외관상으로 2개의 자매 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차이의 요소가 되었다.
 first class cabin first class stateroom2
Titanic-Grand-Dining-Saloon
RMS Titanic의 프로멘나드 덱(Promenade deck, 갑판 산책통로)
이 외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B deck)의 창 측 전체에도 프로멘나드 덱(Promenade deck, 갑판 산책통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B deck)의 프로멘나드 덱이 폐지되어, 대신 창측 전체에 1등 객실을 새롭게 설치하도록 변경되었다. 그 결과 1등 객실이 수가 올림픽에 비교해 증가하여, 전용의 프로멘나드 덱도 설치된 스위트룸(영화 타이타닉의 히로인의 혼약자의 방)이 2방이 설치되게 되었다.
 RMS Titanic의 거대한 스크루
RMS Titanic(검정색 부분)과 크기 비교
세계최대의 객선, 당시 두 자매 선의 중량은 같을 예정이 었으나, 객실 수가 늘어나 최종적으로는 타이타닉의 중량이 올림픽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이타닉은 올림픽을 넘어, 당시 확실히 세계최대의 객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에 가려 있었던, 타이타닉의 지명도가 올라가게 된 것은 우습게도 침몰사고 뒤부터이며, 나쁜 의미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난사고의 불길한 전조
1912년4월10일에,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사진 참고)에서 타이타닉(RMS Taitanic)은 처녀항해에 출항했다. 이때부터 불행한 징후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의 스크루에서 발생한 수류로 인해, 객선 뉴욕 (SS City of New York)과 충돌을 일으킬 뻔했었다.
왼쪽의 타이타닉(RMS Taitanic)과 충돌 일보 직전에서 회피한 오른쪽의 뉴욕 (SS City of New York)
 "Nearmiss" 타이타닉(RMS Taitanic) 스쿠류에서 발생한 엄청난 수류가 발생하는 장면
 Titanic on her way after the near collision with the SS New York. On the left can be seen the Oceanic and the New York.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 선장의 지휘하에 승원승객 2,200명 이상을 태우고 있었다. 이 배의 1등 특별실는 6일간의 항해 비용이 4,350달러로 알려졌다. 출항하여 먼저 프랑스 쉘부르(Cherbourg-Octeville)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현 Cobh)에 기항해, 미국의 뉴욕 항으로 향했다. 쌍안경을 넣어 두었던 록커에 열쇠를 인수인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담당 선원이 퇴선해 버려, 록커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한 채 육안으로 전방의 장애물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타이타닉 운명"의 결정적이었다고도 한다.
RMS Titanic의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 선장
이것이 뒤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 된다. 14일 오전부터 가끔 해당 해역에서는 빙하의 해류군의 위험이 선박 사이에서 무선 통신으로 경고되고 있었다. 적어도 타이타닉은 같은 날 6통의 이와 같은 경고 통신을 수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절의 북대서양 항해에서 경험상 자주 있을 수 있는 일로 취급되어 무시되었다.
. 왼쪽 자매선 올림픽(RMS Olympic)과 함께 정박하고 있는 RMS Titanic, March 6, 1912
"Olympic Class"의 3번째 선박 브리타닉호(HMHS Britannic, HMHS는 His Majesty Hospital Ship)  병원선으로 탈바꿈한 브리타니호 브리타니호의 최후 모습 1915년12월12일 진수직후 영국 해군성의 명령으로 병원선으로 징용되어 선체는 순백으로 도장하고 녹색 라인과 적십자를 그려 넣었다. 1916년11월12일 14시 23분 영국에서 그리스 에게해 림노스(Limnos or Lemnos)를 향해 출항했다. 이것은 브라타닉의 6번째 항해였다. 11월15일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11월17일 아침에는 석탄연료와 식수보급을 위해 나폴리 항에 도착했다. 메시나 해협 (Stretto di Messina)을 통과하고, 11월21일 그리스 에게해에서 독일군이 3주전에 부설한 기뢰에 접촉하여 21명의 사망자를 내고 120미터 해저에 침몰했다. 이것이 브리타닉의 마지막 항해였다.
그리고 타이타닉의 통신사들은 여객들의 전보발신 업무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4월14일 23시40분, 북대서양의 뉴펀들랜드(Grand Banks of Newfoundland) 해역에 도착했을 때, 타이타닉의 감시역이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정도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불행히도 물론 이때에 쌍안경은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타이타닉의 높이는, 선체 바닥에서 굴뚝 끝 부분까지 52.2미터. 빙산은 그 10% 정도 밖에 수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수중에서 충돌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
충돌 회피행동, 감시역의 프레더릭 프리트(Fredrick Fleet)와 레지널드 리(Reginald Lee)는 빙산을 발견하자 즉시 비상종을 3번 치고 나서 전화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취해진 행동은, 전속력 후진(Full Astern)이란 지령을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22.5노트에서 정지하기까지는, 족히 1,200미터의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수부분은 회피가 되었으나 배 전체의 접촉을 피할 수 없었다.
빙산은 우현을 스쳐서 배는 멈추었다. 충격은 선교(브리지)에서는 적었고, 이때 회피되었는지 아니면 피해가 적은 걸로 생각했었다. 배와 빙산은 최대한 10초간 정도밖에 접촉하지 않아 선체의 흔적은 겨우 몇 인치 정도로, 손상 넓이를 합쳐도 겨우 1입방 미터 정도의 손상이었던 것이 나중에 해저탐색에서 판명되었다.
The first-class Grand Staircase aboard the Titanic.
 RMS Titanic의 휘트니스 시설
RMS Titanic의 침몰하는 모습
그러나 우현 선수에는 거의 90미터에 걸쳐서 가늘고 길게 생긴 손상은, 선수의 5구 획에서부터 침수를 가져왔다. 이것은 방수격벽의 한계를 훨씬 초과하는 것으로, 격벽을 넘어 엄청난 해수가 방수구획을 흘러 넘쳐, 선수에서 선미로 향해 침수가 확대, 배는 선수부터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침몰까지 하게 되는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써는, "측면을 스치는 듯이 빙산에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또 당시 뒤떨어진 철강기술로 인해 불순물로 황화 망간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선체의 철강이 사고가 난 이 날과 같은 저온 날씨에 약해지는 성질이었다는 것이 최근의 샘풀조사에서 알려졌다.

 당시 RMS Titanic의 사고 해역, 1912년 4월15일
타이타닉 선장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는 배수를 시도해 보았으나 겨우 수분의 시간을 버는데 그쳤으며, 거의 효가 없는 수고로 그쳤다. 날이 바뀌어 4월15일 0시15분, 조난신호 "CQD"를 발신, 부근의 선박에 구조를 청했다. 이때 약 18-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리랜드 사의 화물선 캘리포니어가 정박해 있었으나, 한 명밖에 없는 통신사가 취침 중으로 연락이 전달되지 않았다.
또 캐나디안 패시픽 사의 마운트 텐푸르호(SS Mount Temple)도 조난신호를 수신하여 구조에 향했으나, 타이타닉에서 20킬로 근처의 지점에 도착해서, 선장 헨리 무어가 빙산과 충동을 두려워해 정선하여, 모든 조명등을 끄고 모르는 척, 죽은 척하고 있었다.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항해일지에는 약 88킬로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은 복수의 승객이, "타이타닉 선체가 부러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의 소리를 들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왼쪽 빙산과 오른쪽 선체의 충돌상황
이 외에도 바마(129킬로 거리), 프랭크프르트(277킬로 거리 ), 발틱(244킬로 거리 ) 등 많은 선박이 조난신호를 수신했었으나, 어느 선박이나 타이타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구조 현장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매 선인 올림픽도 타이타닉으로부터 약 80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약 90킬로 떨어진 지점에 있던 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가 구조요청에 응답하여 전속력으로 구조 현장으로 향했으나, 14노트의 늦은 걸음걸이로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침몰로부터 2시간40분 뒤(타이타닉 빙산충돌에서 침몰까지와 거의 같은 시간)인 오전 4시였다.
당시 RMS Titanic의 사고를 전하는 뉴욕 타임스 신문 내용
 당시 RMS Titanic의 사고를 전하는 뉴욕 헤럴드 신문 내용
조난신호는, 모르스 신호(Morse code)의 "SOS"(. . .---. . . /Save Our Ship or Save Our Souls)가 사용되었었으나, Global Maritime Distress and Safety System(GMDSS)로 바뀌어, 1999년 모르스 방식의 신호는 통신으로 폐지되었다. 당시에는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8, 이탈리아 무선 연구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 마르코니 무선회사 설립)가 발명하여, 1904년에 채택된 "CQD"(come quick, distress)가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않았다. 1906년에 열린 베를린 제1회 만국 무선통신 회의에서 "SOS"가 채택되어, 1908년에 정식으로 비준되었다. 그러나 "CQD"는 최초로 쓰기 시작한 영국의 통신사 사이에서는 이 뒤로도 수년간 계속 쓰여왔다.
RMS Titanic과 충돌하여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는 빙산. 타이타닉과 같은 붉은 도료와 파편과 같은 것이 부착되어 있다. 빙산의 규모는 사진으로는 정확히 그규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Willy Stower가 그린 RMS Titanic의 침몰하는 모습
"CQD"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09년1월 북유럽 발틱 해(Baltic Sea)에서 "플로리다"와 "리버브릭"의 충돌 해난사고 였으며, 이 신호로 승객 1,500명이 구조되었다. "SOS"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09년6월 포르투갈에서 대서양 해상으로 1,000킬로 떨어진 아소레스 제도(Acores) 해역에서 난파된 "스라보니아 호"였다. 타이타닉 호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SOS"를 발신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타이타닉 호가 처음 "SOS"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마르코니식 전신기를 장비한 선박 가운데, "SOS" 조난신호를 처음 사용한 것이 타이타닉이었다 라고 하는 일이다.) 더불어 타이타닉은 당시 막 제정된 새로운 조난신호 "SOS"를 도중에 "CQD"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다.
모르스 신호(Morse code)의 전보기(전신기, Telegraph machine, 1845년?)의 참고자료
 대만 淡水 紅毛城(옛 네덜란드 및 영국 대사관저) 소장 전시품의 모르스 신호기, 20090531 紅毛城은 영국의 중국(상해) 공략의 최초의 전초기지로 사용된 전략적인 무대였다.
RMS Titanic에서 타전된 "CQD" 및 "SOS" 구조 전문내용
충돌 약 30분 뒤인 4시15분에 "CQD"로 시작하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했다.
「CQD CQD CQD DE MGY 41.46N 50.14W SINKING WANTS IMMEDIATE ASSISTANCE」 번역 : "조난했다. 여기는 타이타닉. 북위 41.46 서경 50.14, 침몰하고 있다. 급히 구조를 요청함."
그리고 3분이 경과하고 나서 선장은 국제회의에서 정해진 새로운 조난신호를 보내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SOS"라고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이다.
「SOS SOS SOS DE MGY CQD REQUIRE ASSISTANCE POSITION 41.46N 50.14W STRUCK ICEBERG TITANIC」 번역 : "조난했다. 여기는 타이타닉. 구조를 청한다. 북위 41.46 서경 50.14, 빙산에 충돌했다. 타이타닉"
구명 구출
침몰이 다가오자 타이타닉에서는 좌현은 라이트러 2등 항해사가, 우현의 머독 1등 항해사가 구명보트에 승선을 지휘, 라이트러는 1등 객선의 여성, 어린이 우선의 승선원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한편의 머독은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하게 대응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상무성의 규정에는 정원 분의 구명보트를 설치할 필요가 없고(규정에는 978명분), 또 덱 위의 장소를 차지하는, 무엇보다도 이처럼 단시간에 침몰하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1,178명분의 구명보트밖에 준비돼 있지 않았다.
또 정원수를 태우지 않은 채 타이타닉으로부터 피난한 보트도 많았고, 이 가운데는 정원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을 태운 채 피난한 보트도 있었다. 결국은 많은 승원승객이 본선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충돌로부터 2시간40분 뒤의 2시20분, 굉음과 함께 타이타닉의 선체는 두 동강을 내며 갈라지면서(수중에서는 셋으로 분열), 드디어 차가운 해저에 침몰했다.
침몰후, 곧 구조로 향하면 조난자 모두가 달라붙어 구명보트까지가 침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른 승무원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많은 구명보트 중에서 한 척(좌현 14호 구명보트)만이 익사자 구출에 향했을 뿐이었다. "로우" 5등 항해사가 준비를 하고 구출에 향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결과,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기온, 해수온도가 낮았었던 관계로, 저체온증 등으로 거의가 짧은 시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저체온증상 이전에 차가운 해수로 심장마비로 수분 이내에 사망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이 가운데는 아직 어린 아기를 껴안은 채의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영웅적 구조활동을 전개한 객선 카파치아호(RMS Carpathia)

The RMS Carpathia
객선 카파치아호(RMS Carpathia)는 큐너드 라인 사(Cunard Line)의 외양객선으로 1903년 영국 리퍼풀에서 미국 보스턴이 처녀 출항이며, 1912년4월의 타이타닉 조난사고에서 생존자 구조를 담당한 선박으로 유명하다. 타이타닉호 사건에서는, 통신사 해럴드 콕댐이 타이타닉으로부터 조난신호를 받았을 때는, 카파치아호(RMS Carpathia)는 뉴욕에서 항해 중이었다. 콕댐은 이때 취침 중에 있는 선장 로스트론(British mariner Sir Arthur Henry Rostron, 1869 - 1940)을 깨워 보고했다.
 British mariner Sir Arthur Henry Rostron (1869 - 1940) 선장
선장은 즉시 항로를 타이티닉으로 향하도록 해 전속력으로 구조현장으로 급행했다. 당시 카파치아호의 설계 최고속도는 14노트였으나, 선장은 선체의 과잉진동으로 인한 손상, 고압증기로 인한 보일러 폭발이라고 하는 위험성을 인식하면서도, 17노트라는 속도로 향했다. 오전 4시 카파치아호는 위험한 빙산해역을 벗어나 조난지점에 도착하여 706명을 구조하였다.
 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로 접근하는 Titanic-Lifeboat

  객선 카파치아(RMS Carpathia)의 선장과 승무원에게 감사의 엽서를 보낸 Titanic 생존자들
선장 로스트론은 뒤에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타프트(William Howard Taft, 제27대, 1867-1930)로부터 백악관에 초청되어, 그에게 수상가능 것으로는 최상급의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18년7월17일 수송임무에 있던 카파치아호는 아일랜드 동해안에서 독일 잠수함 U55의 어뢰공격을 받았다. 생존한 승원승객 157명은, 다음날 구출되었다. 1999년 미국 작가이며 다이버인 커슬러(Clive Cussler)씨가 카파치아호의 침몰 해저에서 선체를 발견했다. 현재 카파치아호의 소유자는 Premier Exhibitions Inc로, 침몰선에서 유물인양을 하고 있다.
 Members of the Titanic's band.
타이타닉 침몰의 음모설
"선박을 소유하고 있던 White Star Line이 재정난으로, 타이타닉호의 보험금을 받기 위해 일부러 가라 앉혔다."라고 하는 음모설이 있다. 이 소문의 근거로는, 타이타닉호를 관리하고 있던 곳은 White Star Line 사였으나, 그 사실상의 소유자는 White Star Line 사에 출자하고 있던 국제 해운 상사의 사장이었던 J.P 모건이었다.
모건은 타이타닉 호의 스위트룸에 승선 예정이 었으나, 출항 직전에 병을 이유로 취소하여, 대신 다른 부호의 부부가 승선하게 되었으나, 이 부부도 승선을 취소하여, 결국 White Star Line 사의 사장인 브루스 이즈메이가 이 방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병중인 모간은, 같은 시기에 북아프리카에서부터 프랑스에 걸쳐 여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나중에 판평되 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애인과도 만나고 있었다.
취소한 승객 중에는 모건과 상당히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수명이나 되었던 점이 판명되었다. "모건은 이 처녀항해 중에 무언가 일어날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있었 던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다. 또 모건은 타이타닉호에 운반할 예정이었던 개인화물도 출항 직전에 취소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승선을 취소하면 이에 따라 사적인 물건도 취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 승선취소의 원인이 된 "여행"의 목적 자체가 무엇이었 던가 하는 점이 밝혀지지 않은 것과, 이 사고는 처음부터 부주위한 운항으로 사전에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음모설"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 당시 타이타닉 호의 승선취소를 한 사람은 이 외에도 50여 명 이상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점은 증명된 사항이 아니다.
바꿔치기 된 객선
타이타닉에는 자매 선으로 "올림픽"이 타이타닉 보다 1년 정도 빠르게, 북미노선에 투입되었었다. 올림픽에는 타이타닉이 취항하기 전에 2회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 1911년9월30일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해역에서 영국 해군 순양함 "호크"와 접촉, 이 사고는 영국 해군 사문회에서 심리되어, 올림픽측의 실수로 인정되어, 해난보험은 일체 받지 못하였다.
1912년2월24일 대서양을 항해 중에 바닷속의 장애물에 자초되어, 스쿠류 한 장을 손상시키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 외에도 선체의 중요한 부분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어, 장기간의 수리가 필요로 했다. 이 두 가지의 사고로 볼 때, 올림픽이 가까운 장래에 파기될 운명의 선박이 아니었는가? 이 점으로 선박을 바꿔지기 했다는 논거가 되고 있다. 즉 폐기 직전의 올림픽을 내장설비 등 약간 사양을 변경하여 "타이타닉"으로 부활시켜, 고의로 빙산에 부딪치게 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일연의 음모설이 일어나는 상황증거로, *석탄창고의 화재가 빙산과의 접촉 사고 전일까지 진화되지 않았다. (일부러 연소시켜 선박을 약체화 시켰다) *대서양을 항해 중에 다른 선박으로부터 6,7회 "빙산경보"가 보내졌으며 이 가운데는 항로상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있는 빙산도 있었으나, 매번 무시되었다. ("빙산에 둘러싸여 움직일 수 없다"라는 의미 깊은 메시지가 보내졌다.)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출항 뒤에 감시용의 쌍안경이 일체 사용되지 않았다. (록커 속에 있었으나 열쇠가 없었다.) *항해 중에 순항속도는 항상 22노트 이상이 었다. (감시가 불미한 상황에서 비상식적으로 선박의 속도가 빨랐다.) *침몰 때에 빙산과 격돌한 부분과 다른 곳에 선체가 자체 무게로 두 동강이 났다. (선체가 자체 무게로 두 동강이 나는 일은 설계상 보통 있을 수 없다)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100만 파운드의 보험을 받았다. (당시로써는 이례의 금액이며, 건조비 50만 파운드를 크게 웃돈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형의 선박이라고 하더라도 올림픽과 타이타닉에는 구조상의 상이한 점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Cancion el Titanic http://www.youtube.com/watch?v=aBonMelsdDA
이집트 미라의 저주설
"운반된 짐 속에 있던 미라에의 한 저주설"이란 서적이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미라의 저주인가? 라고 하는 점이 아래와 같이 언급되고 있다. 1910년 이집트에서 도굴자들이 피라미드 내부에서 "아문 라 신전"의 여왕의 미이라를 훔쳤다. 미라의 도굴 중에 도굴자의 한 사람은 급사. 이 미라를 도굴자는 영국의 학자에게 팔았다.
그러자 미라를 판 도굴자는 그날 밤에 급사. 미라를 산 영국의 학자는 3일 뒤에, 사냥을 갔다가 총이 폭발하여 커다란 부상. 미라를 가지고 영국으로 가는 도중, 동행한 2명이 급사. 그리고 미라를 취급한 이집트인 두명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학자는 공포를 느껴, 관을 어느 부호의 부인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부인의 모친이 돌연사. 이 부인도 공포를 느껴 미라를 대영 박물관에 기부했다. 전시된 미이라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카메라 맨이 급사. 전람회를 기획한 학자도 그날 밤 침대에서 급사.
이 무렵 뉴욕의 박물관이 미라가 필요하다고 요구해 왔다. 그래서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에서 뉴욕으로 수송하기 위해 타이타닉호에 실기로 했다. 그러나 미라는 불침선으로 알려진 타이타닉과 함께 대서양에 가라 앉아 버렸다. 그 뒤로 미라는 바다에서 끌어 올려져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또 미라는 2001년 경까지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까지도 보관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또 생존한 선원이 "선장은 보통 때와 같이 빙산의 경고를 무시했다. 성격도 돌변해, 배의 스피드 업에 정신이 없었다."라고... 타이타닉 선장 E.J 스미스(Edward John Smith)에게 이상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이것에 대해서는 "미라의 저주"와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 아무도 없다. 또 스미스 선장의 태도가 보통 때와 달랐다고 하는 것은, 처녀항해로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 기록"(Blue Riband 상)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하는 설도 있다.
대서양 횡단의 스피드 경쟁(Blue Riband 상) 기록 설
타이타닉이 빙산에 충돌한 것은, 대서양 최속 횡단기록(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 원인이란 설이 있다. 이것은 당시 일반에 가장 널리 신빙성 있게 알려져 있다. 1912년 당시에 "Blue Riband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서쪽 항해와 동쪽 항해와 함께 모리타니아(RMS Mauretania, 통상 Maury)였으며, 평균속도는 26노트 가까운 것이었으며 두 배를 비교해 보면,
모리타니아 : 31,938톤, 기관 증기터빈 4기/4축, 기관출력 68,000마력, 최고속력 26노트(최고기록 28노트)
타이타닉 : 46,328톤, 기관 증기 레시프로 2기, 증기터빈 1기/3축, 기관출력 46,000마력, 최고속력 23노트 이며, 기관의 성능으로 보아, 타이타닉은 "Blue Riband 타이틀"을 노릴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을 목표한 모리타니아와 같은 고속선은, 그 막대한 운항비용(연료비)을 수송하는 인원과 화물만으로는 충당이 불가능하고, 정부의 보조금에 의해 운항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총톤수를 확대하여 수송력을 증대하여, 기관출력을 억제하여 연료비의 코스트를 절감하여, 보조금 없기로도 채산이 맞도록 운항이 되도록 설계된 배였다. 이 점으로 보아 타이타닉이 "Blue Riband 타이틀"을 획득을 노린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모리타니아 호 (RMS Mauretania, 통상 Maury) 
선적은 영국의 Cunard Line 소속, 당시 세계 최속의 객선. 이전에는 1897년 독일 객선 SS Kaiser Wilhelm der Große가 22노트(41km/hr)를 기록하여 "Blue Riband 타이틀"을 수상했다. 영국이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제1차 세계대전 때에 군사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주로 병사를 운반하는데 쓰였다.
모리타니아는 고속이었던 관계로 독일의 U보트에 격침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며, 캐나다 정부의 의뢰로 하리팩스에서 리퍼풀까지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으로 활약하였다. 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1917년에는 미군병사를 수송하기도 했으며, 이 가운데 종전을 맞이했다. 이 뒤로 다시 객선으로 부활. 1935년 정식으로 현역은퇴. 역사깊은 모리타니아의 해체가 결정되자 많은 팬들이 항의를 했으며,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까지 항의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타이타닉 사고후의 대책
최신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불린 최 신예선의 대사고는,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구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고의 희생자 수는 여러 설이 있으나,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의하면, 이 사고로 희생자 수는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였다.
이 사고를 교훈으로 선박, 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관해,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 1914년1월 "해상에서 안전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려, 구미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조약"(The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1914)로써 채택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장치 설비의 의무제가 강화되어, 무선통신이 보급되는 원인이 되었다.
타이타닉의 해저탐사
이 뒤로 바트러의 호응으로 "타이타닉 국제보호 조약"이 제정, 같은 해 6월18일, 미국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타이타닉을 보존대상으로 지정하여, 유물의 열화 등을 방지, 그리고 불법적인 유품회수 행위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해저의 타이타닉은 전복한 상태가 아닌 배 바닥을 밑으로 하여 가라앉아 있어. 제3굴뚝의 바로 밑 부분에서 부러져 있어, 해상에서 선체가 두 동강 났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2003년6월, RMS Titanic의 침몰한 모습을 촬영한 러시아의 Mir I 잠수정의 외부 카메라의 영상
심해는 박테리아의 활동이 약해 선체의 보존상태는 좋아, 많은 조각품으로 사용된 내장제품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운 나쁘게 다른 심해와 비교하여 수온이 높아 박테리아의 활동이 활발하여 배의 손상은 예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당초 선체는 충돌하듯 해저에 추락해, 선내의 비품은 물론 갑판의 작은 물건이나 유리창 등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을 걸로 생각했었다. 선수 부분의 난간은 아직 남아 있으며, 항해사실의 유리창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또 선내에는 샹들리에를 포함한 비품이 아직 존재해, D deck(D 갑판)의 다이닝 룸에는 호화로운 장식으로 치장된 커다란 창문이 깨지지 않은 채 여러 장이,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객실의 한 곳의 세면대에 놓여 있었던 꽃병과 컵은 침몰 당시의 충격이나 90년 이상의 부식에 견디어, 현재까지도 침몰전과 같은 장소에 그대로 놓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해저에 곤두박질 치듯이 해저에 가라않은 것이 아니라, 선수 부분부터 해저에 서서히 가라 않았다고 생각된다. 현재 타이타닉은 철을 소비하는 박테리아에 의해 이미 철재의 20%가 산화되어, 2100년경까지는 붕괴소멸할 것으로 보고있다.
RMS Titanic 항해사들

뒷줄 왼쪽으로부터(전원생환) 객선사무장, 허버트 맥크엘로이(Chief Purser Herbert McElroy) 2등 항해사, 찰스 하버드 라이트러(Second Officer : Charles Herbert Lightoller) 3등 항해사, 하버드 존 빗트맨(Third Officer : Herbert John Pitman) 4등 항해사, 죠셉 그로브 복스홀(Fourth Officer : Joseph Grove Boxhall) 5등 항해사, 해롤드 곧후리 로우(Fifth Officer : Harold Godfrey Lowe)
앞줄 왼쪽으로부터(전원사망) 6등 항해사, 제임스 폴 무디(Six Officer : James Paul Moody) 항해사장.부선장, 헨리 와일드(Chief Officer : Henry Tingle Wilde)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Captain : Edward John Smith) 1등 항해사, 윌리엄 마크마스터 마독(First Officer : William McMaster Murdoch)
RMS Titanic 콜렉션
1910년 White Star Line(RMS Titanic) 사의 항해사용 유니폼 단추(직경 2.6cm) 
1910년 White Star Line(RMS Titanic) 사의 스튜디어스 유니폼 단추(직경 1.6cm) 
항해사와 스튜디어스 용의 실물 크기 비교  (직경 2.6cm) (직경 1.6cm)
White Star Line 사의 선장 모자용 "Wappen" 
RMS Titanic(White Star Line)의 기관사용 호루라기(복제품)
오리지날은 생환한 3등 항해사, 하버트 존 빗트맨(Third Officer : Herbert John Pitman)이 가지고 있었으나, 1991년 런던 옥션에 약 800만원에 낙찰되었다. 아래 사진의 것은 1912년 당시의 것을 충실히 재현했다.
 "The Acme Thunderer, Made in England" "TITANIC"
RMS Titanic의 메뉴(Titanic Entertainments)

일등선 객실용 메뉴(First Class) 75호주 달러, 3등선 객실용 메뉴(Steerage) 75호주 달러, 그리고 각 메뉴에는 어린이 요금이 따로있다. 일등선 객실용 (First Class) 레스토랑에서는 남성은 쟈켓 그리고 넥타이 착용이 의무적이다. 이 메뉴표는 細野正文(호소노 마사부미, 일본인 유일의 생존자로 승선자의 한 사람)씨가 제공한 것임.
타이타닉의 주요 승원승객 명부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이 사건으로 자기 스스로 배와 같이 운명을 같이했다. 항해사장.부선장, 헨리 와일드는 이 사고로 사망 1등 항해사, 윌리엄 마크마스터 마독은 이 사고로 사망. (실제는 승객을 쏘지도 않았으며, 자살하지도 않았다.) 2등 항해사, 찰스 하버드 라이트러는 전복한 B호 보트에서 12호 보트로 생환. 3등 항해사, 하버드 존 빗트맨는 5호 보트로 생환 4등 항해사, 죠셉 그로브 복스홀은 2호 보트로 생환 5등 항해사, 해롤드 곧후리 로우는 14호 보트로 생환 6등 항해사, 제임스 폴 무디는 이 사고로 사망 기관장, 죠셉 벨은 이 사고 사망. 밴드 마스터, 월레스 하트리는 이 사고로 사망.(그는 승무원의 신분이 아닌, 2등 선객으로 승선) 細野正文(호소노 마사부미, 일본인 유일의 생존자로 승선자의 한 사람) Isidor Straus 조난자(1845-1912), 독일출신 미국 실업가, 뒤에 메이시스 백화점을 매수, 세계적인 백화점으로 키웠다. Elizabeth Gladys “Millvina” Dean(1912- ) 오늘 현재 유일의 생존자, 당시 생후 2개월로 최연소 승선자. 바바라 웨스트 타닌턴, 2007년 사망, 최후에서 2번째의 생존자, 조난당시 생후 11개월. 리리안 애스프런드(Lillian Gertrud Asplund, 1906-2006)미국 여성, 사고의 기억이 있는 최후의 생존자로, 조난당시 5세 *레오날드 데카프리오(Leonardo Wilhelm DiCaprio, 1974- )는 이 사고로 사망, 윈슬랫과 함께 타이타닉 침몰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음, 할리우드 배우. *케이트 윈슬랫(Kate Elizabeth Winslet, 1975- )은 이 사고에서 생환, 데카프리오와 함께 타이타닉 침몰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음, 할리우드 배우.
MS Titanic의 설계사 "Mr Thomas Andrews Jr."
”The Titanic is now about complete and will I think do the old Firm credit tomorrow when we sail” 타이타닉을 설계한 조선 기술자는, 북아일랜드 콤버(Comber)에서 1873년2월7일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치가로 활약, 고등 재판소 판사였으며, 그의 형 존은 뒤로 아일랜드 수상이 된 인물이다. 조선 기술자 토마스는 명문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타이타닉을 건조한 "허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 Heavy Industries Ltd) 중공업 회사의 회장 "피리 경"의 자매이다. 토마스는 1884년 왕립 벨파스트 아카데미에 진학하여 1889년 16살 때에 "허랜드 앤 울프"에 견습생으로 입사했다.
 Mr Thomas Andrews Jr."
간부 후보생으로 5년간의 수업은 기계공학. 기계구조 등의 기술적인 재능을 습득했다. 현장에서 중역과 같은 기술자 동료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으며, 1901년 28살 때에 "허랜드 앤 울프"사의 조선 책임자로 발탁되어, 유명한 해군 건축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Andrews는 이 무렵 White Star Line사 발주한 4척의 대형객선 「Celtic」, 「Cedric」, 「Baltic」, 「Adriatic」의 건조를 지휘했다. 1907년 "허랜드 앤 울프"사는, Andrews의 능력을 인정하여 이 회사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벨파스트 조선소에서는 위에서 아래까지 누구나가, 그의 일에 대한 능력과 성실하고 겸허한 인품을 존경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해에 "올림픽 건조" 계획이 발표되고, 세계 최대의 호화객선 "올림픽" 그리고 "타이타닉"의 기공식이 시작된다. 1908년 Andrews는 결혼하여, 2년 뒤에 1910년 장녀 "Elba"가 태어났다.
 "Elba"
1911년5월31일 타이타닉 진수식, 동시에 올림픽이 처녀항해를 위해 리퍼플로 떠나는 이 날에는 이 모습을 보려고 10명의 인파가 벨파스에 모였다. 1912년4월2일 시험운전을 마친 타이타닉은, 10일 드리어 출항하는 날이었다. Andrews는 올림픽 때와 같이 선내의 최종점검과 이후 개량해야 할 점을 파악하기 위해 타이타닉에 승선하기로 했다.
그가 항해 직전에 처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금 타이타닉은 거의 완벽한 배다. 내일 무사히 출항하면 우리 조선소는 더욱 이름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Andrews는 티켓 No. 112050으로 A36호실에 승선했다.
출항 후로 그는 차후 개선점을 첵크하고, 브릿지에서 설계도를 점검에 몰두하는 매일이었다. 4월14일 밤 11시30분 타이타닉은 빙산과 충돌, 선체우현측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스미스 선장과 함께 배의 손상을 조사한 Andrews는, 타이타닉이 1시간이나 1시간 반에 침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선장은 항해사들에게 구명보트 준비를 명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Andrews는 승객, 승원들에게 "구명보트에 타라, 구명동의를 착용해라."라며 명령하면서, 다들 용기를 갖도록 힘썼다. 오전 2시10분 Andrews는 일등 흡연실에서 구명동의를 착용하지 않은 채, 난로 위에 걸려 있는 그림, "새로운 세계의 접근"(The Apporoach To Plymouth Harbour, Norman Wilkinson)을 바라 본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었다고 생존자의 한 사람이 증언했다.
Mr Thomas Andrews Jr. 이 때 그의 나이 39세.
(선내 개량점검을 위해 타이타닉에 승선한, Andrews가 선발한 "허랜드 앤 울프"사의 기술자 8명도 이때 전원 사망했다.)
The Nine Men Harland & Wolff Guarantee Group
| Mr.Thomas Andrews Jr. ( Managing Director) |
| Mr William Henry Campbell (Joiner Apprentice) |
| Mr Roderick Robert Crispin Chisholm (Chief Draughtsman) |
| Mr Alfred Fleming Cunningham ( Apprentice Fitter ) |
| Mr Anthony Wood "Archie" Frost ( Foreman Fitter ) |
| Mr Robert J. Knight ( Leading Hand Fitter Engineer ) |
| Mr Francis "Frank" Parkes ( Apprentice Plumber ) |
| Mr William Henry Marsh Parr ( Assistant Manager of the Electrical Department ) |
| Mr Ennis Hastings Watson ( Electrician Apprentice ) |
타이타닉호 최후의 생존자인 밀비나 딘(Millvina Dean, 여) 사망
 1994년9월 촬영
2009년5월31일, 타이타닉호 최후의 생존자인 밀비나 딘(Millvina Dean, 여)이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이타닉 인터내셔널 소사이어티는 폐렴의 증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전했다. 딘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생후 2개월의 갓난 아기로, 최근 생활고 때문에 자신의 소장품을 경매에 내놓아 화제가 되었었다.
RMS Titanic 기념비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Southampton)


Taitanic : Love, Happy and Accident Willard Wigan's Made : Taitanic Taitanic : How Much?
RMS Titanic의 기타 참고 정보들 Length - 882 feet 6 inches. Beam - 92 feet 6 inches. Draft - 34 feet 6 inches. Height - 175 feet from keel to stack (the boat deck was 60 feet above the waterline). Decks - 9 total, A through G with the boilers below. Tonnage - 46,328 Registered Tons. Displacement- 66,000 tons Hull Construction - 1 inch thick plate steel held together with over 3 million steel rivets. Power plant - 29 coil stoked boilers, each 3 stories high. The boilers used 3 of the stacks for exhaust, the fourth was used to vent Titanic's' numerous kitchens and galleys. The stacks were 22 feet wide and 62 feet high. 28 fully decorated First Class Suites. heated swimming pool. 4 electric elevators (3 in First Class and 1 in Second Class). 2 libraries. 4 restaurants. 3 galleys.
RMS Titanic의 놀라운 각종 수량, 1Lb(파운드) = 453g 29,000 pieces of glassware 44,000 pieces of cutlery 75,000 lb. fresh meat 11,000 lb. fresh fish 4,000 lb. salted and dried fish 7,500 lb. bacon and ham 25,000 lb. poultry 40,000 fresh eggs 2,500 lb. sausage 40 tons potatoes 3,500 lb. tomatoes 2,500 lb.. green peas 7,000 heads lettuce 1,000 loaves of bread 2,200 lb. ground coffee 800 lb. tea 10,000 lb. rice and dried beans 10,000 lb. sugar 250 barrels flour 10,000 lb. cereal 36,000 apples 36,000 oranges 16,000 lemons 1,000 lb. grapes 13,000 grapefruit 1,120 lb. jam and marmalade 1,500 gallons fresh milk 1,200 quarts ice cream 600 gallons condensed milk 6,000 lb. butter 15,000 bottles of ale (beer) 1,000 bottles wine 850 bottles liquor 8,000 complimentary cigars Titanic used 14,000 gallons of drinking water each day. 57,600 crockery items (pots, pans, baking sheets)
Survivor Rates : Passengers Women and Children Men Total First Class 94% 31% 60% Second Class 81% 10% 44% Third Class 47% 14% 25% Crew 87% 22% 24% Total Survivability : 31.6% Total Possible Survivability : 53.4% (with all lifeboats filled to capacity)
RMS Titanic http://www.youtube.com/watch?v=8wTlureUMP8
Real pictures of RMS titanic http://www.youtube.com/watch?v=8nG6v4L0gYU&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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