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사기에 잘 걸려들까
여러해 전 아프리카 곳곳을 여행하다 사기 피해 한국인이 많은 사실에 놀란 바 있다. 한국인끼리 사업하다 당했다는 경우는 그렇다 치고 국제성을 띤 419 사기에도 큰돈을 뜯긴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형법 419조를 줄여 쓰는 419는 보통 ‘국제사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세계 도처에서 이런 조직적인 사기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구글이나 야후 영문판에서 419를 검색해 보면 그 유형과 피해 사례로 수천, 수만건이 줄줄이 뜬다. 그러나 이마저도 빙산의 일각이다.
피해자가 부끄러워 쉬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반군지도자가 숨겨 놨던 보물의 해외 반출을 도와 달라는 제안에서부터 국제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광석을 공급할 수 있다거나, 용액 속에 넣으면 눈앞에서 달러로 바뀌는 ‘블랙달러’에 이르기까지 온갖 교묘하고 그럴듯한 수법이 동원된다.
사기범들은 덫을 쳐놓고 이메일과 팩스 등으로 희생양을 찾는다. 남아공과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름 있는 한국인 피해 사례가 인구에 회자된다.
한국인은 이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돈이 많은 데다 워낙 잘 걸려들기 때문에.
오죽하면 아프리카 등 해외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사기 피해 주의를 당부하는 자료까지 배포하겠는가.
나라마다 생활과 문화의 특성이 다르기에 범죄 건수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혹시 사기사건을 국제비교한 통계가 있다면, 남부끄러운 말이지만, 한국사회는 그 유형이나 건수로 아마 최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지난 연말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사기사건’으로 지목된 다단계업체 제이유그룹 관련 피해자는 34만명이고 피해 규모가 4조6000억원이라고 알려졌다.
알려진 이런 업체 외에도 불법 다단계업체들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정규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가짜 박사들, 청와대 등의 고위직을 사칭한 사기, 부동산 사기분양 등도 늘 극성을 부린다.
왜 사기사건이 많을까. 추측건대 한국사회의 조급증과 대식(大食)주의 탓이 아닐까. ‘천천히 꾸준히’ 하는 것을 미욱하게 여기는 풍조, 단기간에 가시적인 결과를 얻어야만 성이 찬다고 여기는 사회풍조가 그 배경이 아닐까. 빨리빨리 해내려는 열성과 부지런함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낳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기범죄와 신용불량을 양산하는 뿌리가 되는 게 아닐까.
거짓으로 미끼를 던지는 사람이나 거기에 걸려드는 사람은 단번에 큰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에 차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회에는 투기가 판을 치고 원칙과 순리는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요행히 한몫 챙겨 도피생활을 즐기는 사기범도 있지만, 대다수는 범죄자의 오명을 쓰고 감옥에 가기 마련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은 경제적 파탄을 겪거나 신용불량에 허덕인다.
21세기 선진사회로 웅비해야 할 한국사회의 신용등급은 아직 ‘C학점’대라는 느낌이 든다. 한국사회를 이끌 정치인의 신용등급부터가 밑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식언(食言)을 일삼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국민을 기만한다.
김경준이라는 금융사기범의 입에 온통 정치인과 국민의 이목이 쏠려 있는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사기꾼의 입에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좌지우지될 지경이니 한국 정치와 정치인의 수준이 불량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는가.
한국사회가 선진화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신용사회 구축이 절실히 요청된다. ‘트러스트(신뢰)’라는 책을 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제 중요한 것은 관습 도덕 협동심과 같은 사회적 자본이며, 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사회 구성원 간의 트러스트”라고 강조했다. 믿음이 없는 정부와 기업, 사회는 고비용과 저효율의 악순환을 거듭한다. 신뢰의 인프라 구축이야말로 선진 한국을 위한 핵심과제이다. 정치판의 신용등급을 높이지 않고선 한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차준영 논설실장
세계일보 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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