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속 소년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붙든다.
파.라.노.이.드.파.크.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완성한 또 하나의 수작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을 처음 접한 건 맷 딜런 주연의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Drugstore cowboy>다. 하지만 그 당시엔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누군 줄 몰랐고 마약에 절어 있는 주인공 역을 한 맷 딜런이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 본 작품이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아이다호>다.
남창으로 나오는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흔들리는 영혼을 연기하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기면 발작증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던, 연기 천재 리버 피닉스는 몇 년 후, 마약으로 인해 사망하였고 미국 영화계에 전설로 남았다.
그 후, 구스 반 산트 감독은 <투 다이 포>, <굿 윌 헌팅>, <싸이코>, <파인딩 포레스터>, <엘리펀트>,<파라노이드 파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국내 상연이 되지 않은 관계로 나는 그 작품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초기의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나 <아이다호> 등 작가주의적 성향을 보이다가
영화계 주류로 들어가 <투 다이 포>,<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등
감독 특유의 주인공 내면을 쫓아가는 섬세한 영상과 휴머니즘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적지 않은 감동을 끌어낸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그만의 작품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엘리펀트>를 찍어 다시 자신의 세계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국제 영화제 상까지 거머쥐고서 말이다.
<엘리펀트>는 미국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을 다룬 극사실주의적 영화다.
같은 무렵,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롬바인>이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어 총기 사건의 사회적 요인을 찾아 집요하게 추적하는 반면,
<엘리펀트>는 그 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콜롬바인 고교의 평화롭고 빛나는 아침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 날, 따뜻한 햇살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콜롬바인 고교의 창으로 들어와 교실과 복도와 계단 구석구석을 비춘다.
사진을 찍는 아이와 사진에 찍히는 아이, 함께 땡땡이를 치는 커플과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아이들, 그리고
동아리 실에 모여 이야기에 열심인 아이들, 왕따를 당하는 아이의 외로움......
조금은 나른한 오후의 적막을 총소리가 깨뜨린다.
그들의 조용했던 오후가 섬뜩한 핏빛으로 물들고
우리는 영상 속에서 처절하게 아름다운 슬픔을 본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상은 아름답다. 그래서 슬픔이, 비극이 배가 된다.
이 작품 <파라노이드 파크>도 역시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주인공의 비극과 상처와 슬픔이 배가 된다.
영화는 주인공 알렉스의 무표정한 표정에서 시작한다.
투명하고 맑은 두 눈동자와 꼭 다문 입술은 알렉스 심연 깊숙이 말하지 못하는 슬픈 비밀을 안고 있다.
보드를 타는 소년, 알렉스는 친구와 함께 간 파라노이드 파크에 푹 빠진다.
보드를 타고 불안하게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알렉스는 해방감을 느꼈는 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보드의 움직임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그리고 함께 들리는 불안한 소리들의 조각난 파편은 마치 알렉스의 내면에서 들리는 듯 하다.
소리들은 보드와 함께 날아 공중에서 분해된다.
소리들은 보드의 움직임과 어우러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보드는 커다란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터널은 막혀 있다. 보드가 다른 방향을 향해 오른다.
하지만 다른 터널의 입구도 막혀 있다.
알렉스의 마음은 닫혀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래서 무표정한 알렉스 표정 너머엔 항상 슬픈 듯 우는 듯 남모르는 표정이 숨어 있다.
형사와의 일대 일 대면, 형사의 눈은 날카롭지만 알렉스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알렉스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바라보는 형사, 루.
절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자기도 모르게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화물 열차에 탄 것도 경비원에게 곤봉을 얻어 맞은 것도, 경비원에게 보드를 휘두른 것도,
하필이면 그 때 열차가 철로 위에 떨어진 경비원 배 위로 지나가 버린 것도.
아직도 살아 남아 반쯤 잘린 상체만 꿈틀거리는 채로, 알렉스에게 손짓하던 경비원......
경비원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눈빛이, 흔들린다.
새로 산 보드를 타고 알렉스는 길 위를 달린다.
태연한 알렉스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이 묻어난다.
알렉스는, 차도 위에 눕는다.
차들이 지나갈 지도 모르는, 도로 위에 눕는다.
알렉스는 위험한 차도 위가 편안하다.
자전거를 탄 친구가 말한다.
편지를 써 보라고.
그 때부터 알렉스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편지에 담기 시작한다.
이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은 걸 토하는 동생, 자신에게 첫 동정을 바치려고 안달 난 여자 친구
자신을 파라노이드 파크로 인도했던 친구 제러드까지.
그리고 그 밤에서부터 새벽까지도.
알렉스는, 노트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실험 실습 시간, 알렉스는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한다...
형사에게 불려 우르르 교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드 타는 아이들...(그 안에는 알렉스도 있다.)
아이들은 보드 위에 서서 불안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보드 위에 서서 불편한 세상을 바라본다.
알렉스는 보드 위로 도망친다.
알렉스는 보드 위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연습을 한다.
알렉스는 자유롭게 보드를 타는 아이들 속에서 해방구를 찾지만,
아무리 보드를 잘 타도 그 안엔 답이 없다.
알렉스는 자기 안에서, 답을 찾는다.
이 작품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 '죽음'과 함께 성장해 가는 한 소년의 성장통이다.
보드는, 혹은 보드 타기는 알렉스의 페르소나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감추어진 사춘기 소년 알렉스의 고통과 상처는
끔찍한 죽음으로 인해 곪아 터지고 피고름이 나온다.
알렉스는 그 죽음과 맞서며 상처들과 고통들을 이겨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sax)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에서
이제, 알렉스는 알을 깨고 하늘로 날아갈 것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
영상만으로도 주인공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음악과 소리 만으로도 영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무표정한 소년의 표정은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
감독이 공들여 찍었을, 영화 속 스틸 한 컷
소년의 표정은, 영화 전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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