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얼마 전 국내 최대 A그룹 실력자인 L씨 상가에서 있었던 일. 평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근엄한 얼굴의 그룹 CEO 몇 명이 이날 과음으로 갈지(之)자형 걸음을 하며 조문객 사이를 누비다시피 했다. 핵심 측근들은 한쪽에서 ‘고스톱’에 열을 올렸다. 고의로 ‘망가진’ 이들의 행동은 상가 분위기 조성을 위해 각자 역할 분담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장면 2
B그룹 총수의 재판을 맡았던 어느 부장판사의 얘기. 조사를 받은 회사 임직원들은 대부분 혐의를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정황을 회장에게 솔직히 보고하지 않아 총수 혼자 ‘모르쇠’로 버텼다. 총수는 나중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분노했다. 최근 B그룹의 잦은 임원 인사는 ‘총수 왕따’에 대한 문책 성격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아부에 약하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칭찬을 아부라고 여기기보다, 그러한 평가를 해주는 타인의 안목을 뛰어나다고 받아들인다. 자기애(self-love)만한 아첨꾼은 없는 셈이다. 아부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누구든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아부의 원조는 기독교 하나님이다. 구약성서 곳곳에서 “나 여호와 이외의 것에 아부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경고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내가 당신을 추켜세우니 당신도 그 대가로 나를 추켜세워라”는 뜻이다.
상하관계가 있는 곳에는 인간과 동물사회를 막론하고 반드시 아부가 있다. 누군가에게 매력적이라는 칭찬을 해주면 실제로 그 사람은 훨씬 더 밝아지고 매력적이 되는 것이 아부의 순기능이다. 미국 타임닷컴 편집장인 리처드 스텐걸은 저서 ‘아부의 기술’에서 아부는 거짓이 탄로 나도 처벌이 없는 무공해 웰빙푸드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본인이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가장 효과만점이란다) ‘그럴듯하게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는 아부의 4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측근이었던 L씨는 정 회장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아부 두 가지를 회고한다. 정 회장 아들에 대한 칭찬에 곁들여, 라이벌인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결단이라고 보고하면 뛸 듯 기뻐했다고 한다. 빌 클린턴의 참모 딕 모리스는 “각하는 링컨, 루스벨트, 윌슨, 워싱턴 같은 대통령보다는 순위가 좀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치러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 다음 순위는 확실합니다”라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알랑거렸다. 클린턴은 누군가의 얘기를 들을 때면 몸과 귀를 상대방 쪽으로 돌리고 미간을 모으는 진지한 자세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뛰어난 경청자야말로 가장 아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들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반사회적인 일이라고 단언한다. 출세한 인물치고 아부 못하는 사람이 드물다. 적자생존이란 강한 사람 대신 말치레가 번드르르한 자가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아부가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지만 적절한 아부는 생활의 활력소이자, 사회의 윤활유다.
아부는 중상모략과는 차원이 다르다. 남을 배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말을 쏟아놓기보다 들어주는 것이 참된 아부의 기본 원칙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이다. 기업과 학교에는 새내기들의 설레는 출발로 긴장감과 상큼한 기운이 감돈다. 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 모호한 ‘아부정신’으로 무장해보면 어떨까.
윤영걸(주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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