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영화 : 색, 계
***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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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브로크백 마운틴]이란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안 감독하면 상당한 인지도를 지니고 있었던 감독이긴 하지만 남녀간의 진지한 사랑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면 약간은 어색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난 후 다시금 정말 대단한 감독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는데요, 그 흔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동성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어떤 사랑영화보다도 비장하고 아프면서, 가슴이 저려오도록 만들어버리는 그의 솜씨에 진한 아픔과 함께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일제 강점기의 중국으로 배경으로 또 한편의 사랑이야기를 그려갑니다. 물론 이번에도 예의 정상적인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서로 사랑해서는 안되는 인물들이 결국엔 자신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경계(戒)와 영역(界)의 굴레를 넘어선 사랑을 보여주려 합니다.
중국처럼 똑같이 일제 강점기의 시기를 겪었던 우리나라도 어찌보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점령자들에게 기대서 자신들의 영욕을 위해 기꺼이 조국을 배신하는 사람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소위 조국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사람들, 그 밑에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겨운 사람들.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고 하듯이 그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현실은 그래도 나름대로 살아갈 구실을 제공하며 그들을 각기 다른 길로 걸어가게끔 합니다. 물론 그 현실 속에는 엄연한 구분(界)이 존재합니다. 절대로 넘어서서는 안되고, 만약 넘는다면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형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계(界)가 존재합니다. 이 영화 [색,계]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절대로 넘어서면 안되는 영역(界)을 넘어서야만 했으며,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그래야만 했던 두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색(色)을 통해 서로간의 계(戒)를 풀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계(界) 안에서 몸부림쳐야했던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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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즈의 이야기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영국으로 가 재혼까지 한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치아즈. 분명히 그녀 또
한 시대의 아픔이 가슴속에 남겨져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그녀의 현실이 분명 현실에서 기인하긴 하지만 그것을 증오로까지 승화할 수는 없습
니다. 어려서부터 극장에 가서 영화보기를 좋아하고 비록 얼떨결에 친구따라 대학극단에 들어가
긴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갖는 것. 그것은 바로
무대에 서서 느껴지는 그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녀는 진심으로 조국으로 위해, 극단 동기들과 함께 친일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정보부 대
장 이(易)를 죽이고 싶었을까. 동료들의 권유로, 조국으로 위한다는 다소 막연한 애국심의 발로
로 그의 동태를 파악, 결국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막부인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지만, 왠
지 치아즈가 막부인의 역할을 즐기는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즐기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돌려 말
하면 막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몰두(마치 연극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하지만 그것이
애국심의 발로라고까지 하기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막부인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합니다(역할의 완벽한 수
행을 위해서 처녀성까지 버리는 모습은 슬프기도 하면서 참 독하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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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말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그 어려운 교육과정도 군소리 없이 받아들
이며, 그 어떤 난감한 지령도 충분히 참아냅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녀가 상대해야할 인물이
易였다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정대로 易를 만나게 되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치아즈는 易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약간의 이상기운을 감지한 듯 합니다. 그
녀가 동료에게 "예상하고 틀리게 생겼어"라는 말한 부분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어긋나
기 시작함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易와의 두번째 성관계때까지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합니
다. 상대의 경계심을 풀기위해 그가 하고자하는 대로 몸을 맡겼던 첫번째 성관계. 그리고 그가
자신을 찾게끔 만들고 홍콩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끔 했던 두번째 성관계때만해도 그녀는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됩니다. 그에게
거의 강간수준으로 성관계를 맺은 후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그녀를 기억하십니까.
하지만 이후부터 약간씩 변화가 생깁니다. 언제까지고 막연히 기회를 엿보기만 하는 조직, 더구
나 단순히 易만 죽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점점 더 광범위한 목적으로 자신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게된 치아즈는 자신 또한 애국심이라는 허울 좋은 대명제하에서 이용당하는 하나의 부속품임
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아버지가 계신 영국으로 가는 것 뿐인
데, 그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속으로 무척이나 갈등을 하지 않
았을까 합니다. 이 일에 동참한 모두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치
아즈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만큼 절박하질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그녀를 더
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녀를 대하는 易의 모습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의 정체
를 캐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치아즈의 목숨 하나 따위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그였지만, 그녀를 위해 따로 집을 구해주고 그녀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무엇보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그의 내면적인 모습을 치아즈의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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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절대로 그 누구도 믿지 않았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그가 치아즈에게 믿는다
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치아즈를 경계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보고 있
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동안 자신의 그동안 철두철미하게 신봉해왔던 자신만의 철칙
(戒)을 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치아즈는 그 또한 자신의 처지와 비
슷함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그 또한 자신처럼 현실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머물러 있는 인물이
라는 이야기입니다. 치아즈가 애국심이라는 명목하에 막부인역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느끼듯
이 易 또한 어느정도 자신만의 사상으로 국가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 무엇도 믿지 못하며, 결국
은 자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간의 동질
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벌였던 세번째 성관계를 기억하십니까. 한참 격렬한 성관계
도중에 易가 걸어놓은 총을 보면서 시선을 교차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그런 그에게 창녀가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는 치아즈. 아마도 아직까지 易를 경계의 대상으로 생
각하고 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易가 준비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면서 여러 복잡한 심경(아마
이 부분까지 치아즈는 易에 대한 마음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듯 합니다. 유난히도 불안하
게 주위를 둘러보던 치아즈의 모습을 생각하면)이 교차했던 치아즈에게 다이아몬드보다 그 반지
를 끼고 있는 당신의 손을 보고 싶었다는 易의 이야기에 치아즈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위한 최선을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느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만 두 사
람. 분명 이대로라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할 리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랑하는 易를 위해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연기가 될 수 있는데, 적어도 그 마지막
연기는 단순히 연기가 아닌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주었던 그 어떤 연기보다 진심이 가득 들어간
연기입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행동하는 易의 모습에 치아즈는 비로소 불안감
을 떨쳐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이 일을 함께 시작했던 극단동
기들과 함께 합니다. 마치 피끓는 젊음을 애국심이라는 거대명제로 표출하려 했지만 그 오랜 세
월동안 처절한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했던 그들을 구원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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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의 이야기
어느 날, 그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동안 그 누구도 믿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戒를 풀
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자리. 상대방의 눈을 통해서 "두려움"을 파악하는데 남다른 능력을 보유
하고 있었던 그에게 치아즈(막부인)의 존재는 다소 생소합니다. 분명,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며
그래야만 했던 그녀지만 그녀의 눈에선 그 흔한 두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를 혼란스
럽게 합니다. 그가 보기에 치아즈(막부인)의 존재는 분명히 그가 선을 그어서 판단할 수 있는 대
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첫인상이 당연히 해야했던 자신의 본분(그녀에 대한 뒷조사)도
잊게끔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경계를 푼 것은 아닙니다. 절대 서두르지 않고, 차근
차근히 그녀를 지켜봅니다.
그또한 치아즈처럼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여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속해있는 단체도 처음부
터 친일세력은 아니었으며 아마 그때만해도 그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체
의 성질이 변하면서 그는 모든이를 의심하고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개인의 영욕과 함께 스스로 살기위해서 살
아야만 합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경계의 선이 모호한 치아즈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는 절대로 그녀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습니다. 그것
이 그가 살아온 방법이고 앞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녀와 벌이는 처
음 두번의 성관계에서도 그러한 그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유독 폭력적이고 강압적으
로 그녀를 밀어부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의 불안한 심리가 어느정도 느껴집니다. 정확하게는
그녀에게 홍콩에 가지말라던 두번째 관계때부터 어느정도 심리가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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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易는 그녀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재산과 지위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항상 외롭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도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말이죠. 그랬던 그에게 치아즈와의
성관계는 단순히 경계를 풀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과 어느정도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되
는 그녀에게 자신의 응어리를 풀어버린다는 의미도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뼛속까지 사
무쳤으면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표출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여하튼 易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
해서 서서히 마음을 열어갑니다. 자신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줄 알았다는 치아즈의 대사나 두 사
람의 관계를 들키면 어떻하냐고 천진난만하게 칭얼대는 치아즈의 모습을 통해 그는 어느새 자신
의 본분을 잊어갑니다. 적어도 그녀와 함께 있고, 함께 살을 맞대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모호하
기만 한 자신의 현실을 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깊어질 수록 그는 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관계가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미래가 장
미빛인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그 피곤함을 풀 수 있는 것
은 너무나도 아이러니하게도 치아즈의 따스한 가슴뿐이었던 것입니다. 戒를 자신의 생활철학으
로 여기며 살아왔던 인물이 정작 경계해야할 인물에게서 삶의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그에겐 너
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심정은 일본조계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큰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처럼, 자신의 현실 또한 그
러함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그와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그의 창녀가 되어주겠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易는 극한의 혼란스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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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두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가는 장면을 돌려보면, 분명 그 순간까지 易는 자신이
이미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를 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지금 어느선까지 가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치아즈와의 관계를 통해서 잊고 있었던 듯
합니다. 易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치아즈와 달리 적어도 이 순간까지 易는 현실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로 보입니다. 분명 그녀에게 은근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긴 하
지만 살짝 돌려가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치아즈의 이
야기를 듣고 차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치아즈를 믿는 것도 있지만 그가 잠시나마 잊
고 있었던 냉엄한 현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입니다. 아마 그가 모든 생각들을 정리하고 치아즈
에게 모든 걸 맡겼다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자신이 그 자리를 피하면 그녀가 어떻게 될 지 그
가 몰랐을리 없습니다. 비록 그녀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의 잠재의식 속을 굳건하게 지배하고 있
는 현실은 그녀와의 분리를 강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후에 그것을 후회하지만 말이죠.
더욱이 그를 더욱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치아즈(막부인)와의 그 모든 일들이 시작부터 감시의
대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높은 지위,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는 있지만 항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믿어서도 안되었던 그에게 자신의 수족과도 같던 부하에게 그동안 감시를 당해왔으
며 자신의 집이 가택수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엄청난 좌절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치아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물론 그녀와 넘어서면 안 될 界의 영역을
넘었어도 비슷한 결과였겠지만 그가 다시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왔을 때, 비록 자신은 산다해도
도저히 산 것이 아닌, 이전보다 더욱 더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에 남아있게 되었음을 느끼게 됩니
다. 치아즈가 묵었던 방의 침대에 앉아서 울리는 종소리에 깜짝 놀라던 易. 자신이 정말 그녀를
사랑했었고,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했었음을 느끼던 그 순간. 易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합
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일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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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발표된 이안 감독의 신작 [색, 계]는 어찌보면 그의 전작과 비슷한 구석이 간간이 눈에 띕니다. 비록 서로간의 대상과 배경은 다르지만, 두 주인공의 세심한 심리묘사를 통해서 현실의 벽에 부딛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사랑을 세밀하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려갑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잭과 달리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내를 꾹꾹 참았던 애니스. 마지막 잭이 남긴 피뭍은 셔츠를 접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애니스처럼, 비교적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치아즈와 달리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과 경계사이에서 방황하던 易. 결국 마지막 치아즈가 사용했던 낡은 침대에 앉아서 뼈저린 후회를 하는 모습은 애니스의 모습과도 꽤나 흡사합니다.
이 영화의 많은 논란이 되었던 두 주인공의 성관계 장면들은 실로 충격적입니다. 물론 이 부분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충격적인 모습과도 살짝 매치가 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 [색, 계]에서 보여주는 실로 적나라한 장면들은 가뜩이나 영화 내내 숨막히게 진행되었던 영화를 더욱 더 숨막히게 합니다. 아마도 극장판에선 일부 장면이 삭제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에 공개되는 많은 영화들 중에서 남녀간의 중요부분이 등장하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색, 계]는 그런 영화들보다 더욱 더 리얼하며 생생합니다. 그동안 봐왔던 영화들 중에서 이처럼 대담하면서도 예술과 포르노의 경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던 영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번의 정사씬들은 나름대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경계의 끈을 놓치 않으려는 易와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에 만족했던 첫번째 정사. 그리고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한 경계가 풀리기 시작하는 두번째 정사. 그리고 어느정도 동등한 위치에서 정사 그 자체를 즐기기 시작하는 세번째 정사(즐긴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합니다). 이 모두는 두 사람이 서서히 자신들의 영역(界)을 넘어서서 상대방에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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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성관계(色)라는 것은 때론 아무 의미없이 서로간의 단순한 목적에 의해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때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더 없이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기도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항상 경계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봐야만 했던 易와 남들보다 간절하게 애국심에 불탔던 것이 아닌, 어찌보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던 치아즈는 두사람의 때론 거칠고 격렬하면서도, 때론 이것이 아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헷갈릴 정도의 관계속에서 차츰 서로를 의지하고 상대방에게 한걸음씩 더 나아갑니다.
본문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름 목적과 나름 자신들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이지만 알고보면 두 사람 모두 여러 경계선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두 사람의 위치를 몇차례의 관계를 통해서 알게되며, 상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易가 속해있던 단체가 치아즈가 속해 있던 단체의 비인간적인 모습들도 한몫을 합니다. 색(色)을 통해서 자신들의 영역(界)를 넘는다는 것은 어쩌면 두 사람에게 주어진 현실 안에서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넘을 수 밖에 없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색(色)이 아닌, 사랑의 감정이었음을 너무나도 뒤늦게 알아버린 것이 더욱 더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었음이 더욱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어느 순간(차츰 경계의 풀어갈 즈음)부터 두 사람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영화 내내 보여지는 易의 날카로워 보이지만 슬픔이 가득했던 눈빛과 비장한 듯 하지만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치아즈의 눈빛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짐작하면서도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두 사람. 비록 계(戒)의 경계는 넘어섰지만 현실에선 어쩔 수 없는 영역(界)의 끝자락에 남겨져 서글픈 사랑을 해야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 [색, 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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