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형주에 대한 추억
경험은 세상을 판단하는 축적된 힘이지만, 변화를 읽는 데에는 걸림돌이 된다. 주식시장에서도 그렇다. 중소형주 장세가 2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처음부터 중소형주에 뛰어들어 높은 수익을 올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중에 대형주로 갈아타거나, 처음부터 대형주만 고집하다 저조한 성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둘을 가르는 경계는 경험이었다. 과거 중소형주 행태, 특히 고점 이후 급락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일찍부터 중소형주에서 발을 뺄 수 밖에 없었다. 하락이 시작되면, 속도가 너무 빨라 대처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경험이 저수익 요인이었지만, 앞으로는 반대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난 30년간 중소형주가 시장을 흔들었던 때의 경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95년 자산주로 시작, 환경 관련주로 滿開. 거론된 기업만 전체 상장사의 12% ‘95년 자산주가 갑자기 상승했다. 2년 반 동안 계속된 중소형주 강세의 시작이었다. 재무제표에 미처 반영되지 않았거나 과소 반영된 자산을 찾아내 이를 주가에 제대로 반영하자는 게 자산주의 상승 논리였다. 삼부토건이 첫 주자였는데, 보유하고 있는 호텔의 가치가 장부가보다 높은 게 재료였다. 가구회사인 선창산업이 삼부토건의 뒤를 이었고 이 때부터 부동산 자산주가 테마로 자리를 잡았다. 자산주가 성행하면서 자산의 개념이 발전했다. 유형자산에서 무형자산으로 투자대상이 확대됐고, 마지막에는 투자자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재무제표 항목을 찾아가는 작업까지 진행됐다. 보험사 지급준비금이 대표적인 예다. ‘96년에 중소형주의 대상이 확대됐다. 이때 등장한 게 환경 관련주다. ‘96년에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함에 따라 환경오염물질 배출 기준이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강화될 거란 전망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환경 부문에 투자해야 하며, 이런 필요성 때문에 환경산업이 기업의 성장전략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96년 한해 가장 활발한 테마였는데, 수질, 대기 폐기물 등 여러 분야의 다양한 종목이 상승 대열에 합류했다. 중요하게 거론됐던 기업이 83개로 전체 상장기업의 12%나 됐다. 어지간한 기업치고 환경이란 수식어가 붙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신약개발과 신물질 관련주로 확대. 환경 관련주와 함께 부각된 게 생명공학과 신물질 관련주였다. 이 주식들이 중간에 변화를 거쳐 지금의 바이오 테마로 발전했다. 20년전 우리나라 생명공학은 시장 규모가 작고, 기술수준도 저급했다. 간단한 기술로 생산이 가능한 예방약과 진단약, 항생제가 제품의 주를 이룰 정도였다. 해외에서 도입하는 제품의 비중이 53%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고 인슐린, 빈혈치료제 같은 경우 전량을 수입했다. 전체 기술수준은 선진국의 40~60% 정도였는데, 생명공학기술을 탐색기술, 개량기술, 생산기술로 나눌 때 생산기술만 선진국 수준에 접근했을 뿐 개량과 탐색기술은 선진국의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부가 생명과학 주식이 부상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정부는 2000년까지 생명공학 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높이고, 21세기 전략 수출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93년에 생명공학육성 기본법을 만들어, 2007년까지 1조 5,000억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세웠다. 법과 지원책이 만들어지고 2년이 지난 후 뒤늦게 주식시장이 반응한 것이다. 생명공학 테마는 신약 개발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상승을 계속해 ‘96년에는 중소형주 시장을 이끄는 핵심업종이 됐다. 해당 업체 중에서는 전통적인 제약사보다 새로운 의약품 개발 회사의 주가가 더 크게 올랐다. 현재 기업실적보다 성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때문이었다. ‘96년 한해 동안 주가 움직임을 보면 종합주가지수가 21.4% 하락한 반면 의약업 지수는 23.5%의 상승했다. ‘96년에 신약과 함께 주식시장에 바람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테마는 신물질 개발이다. 환경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새로운 소재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해 향후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었다. 가장 성공적이어도 몇 년 후에나 상품화가 가능한 것들을 당장 개발 판매가 될 것처럼 포장해 주가에 반영했다. 특별한 이론적 배경도 없고, 특허를 출원중인 수준에 불과해 검증도 되지 않은 물질들이 재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시간이 지나 정리해보니 당시 얘기되던 것들의 대부분이 실제 수요자에 의해 검증되기보다 종이에 의한 검증으로 끝난 것 같다. 주가를 유지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신물질이란 테마가 제공해 주지 못한 것이다. 재미 삼아 당시 얘기됐던 신물질 몇 개를 살펴 보면 세프라인이란 주방기기 생산업체의 주가가 ‘세계최초로 초전도 남비의 특허를 출원중’이라는 재료를 이용해 배 이상 올랐다. 신동방이라는 음식료업체의 주가도 무공해 산업용 ‘물’을 개발하고 있다는 얘기 하나로 20,000원대에서 50,000원대로 올랐다.
폭락. 연속 하한가에도 매수자를 찾기 힘들어 2년 동안 주식시장을 흔들었던 중소형주는 ‘97년 마지막 상승과 폭락을 겪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였다. 위기 발생 전에 약세로 기울었던 중소형주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폭락했다. 상당수 종목이 열흘 가까이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음에도 매수자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대단한 재료를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돼 주가가 올랐던 종목이 가격이 하락하면서 재료가 소멸돼 버리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결국 재료는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2000년에는 IT와 닷컴 기업이 주역. 폭락 때에는 1년 사이에 시가총액의 95%가 사라지기도 다음은 2000년이다. 세계적인 IT버블과 벤처 열풍, 인터넷 기업이 중심이 된 닷컴 열풍까지, 여기에 10%에 달하는 경제 성장이 더해지면서 전례없는 중소형주 강세가 나타났다. 닷컴 기업들이 코스닥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시가총액이 거래소의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아 ‘닷컴 신드롬’이 꺾이지 않을 거란 전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열풍의 배경에도 정부가 있었다. 대기업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낙인 찍히자 정부는 경제를 끌고 갈 새로운 주체가 필요했다. 이때 선택된 게 벤처였다. ‘99년 정부가 벤처 살리기의 일환으로 코스닥 등록 요건을 완화한 데다, 증시마저 활황을 보이자 코스닥시장은 ‘벤처 기업의 꿈의 장터’로 여겨졌다. 부도에 직면한 기업들이 코스닥 시장에 등록한 후 우량한 IT업체로 탈바꿈되는가 하면,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던 기업도 겉포장을 잘해 코스닥 시장에 들어오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 기업 경영보다 회사를 사고 파는데 관심이 더 많은 대주주들이 참여하면서, 벤처의 생명인 기술 개발은 뒤로 밀리고 공모자금이나 증자대금을 가지고 문어발식 투자에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시장에서 이런 투자가 먹혔던 건 닷컴을 포함한 IT기업들이 지금은 적자 상태지만, 앞으로는 선발자 이득에 따라 독점적인 이윤 추구가 가능할거란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처가 참여하는 영역 대부분이 새로운 산업이므로 당장에는 적자 상태여도 이를 견디면 이익이 본 궤도에 들어가면서 수익성 높은 기업으로 바뀔 거라 믿었다. 2000년 중소형주 장세 역시 폭락으로 마감됐다. 나스닥 시장이 5000을 돌파하기도 했지만 수익모델 논쟁에 휩쓸리면서 연말에 3000으로 떨어졌다. 4월 14일에는 하루 사이에 9.7%라는 기록적인 하락이 발생하기도 했다. 코스닥 역시 2000년 초 3000에서 연말에는 고점의 1/6 수준인 500으로 내려왔다. 기업은 더했다. 비교적 우량한 코스닥 기업인 다음커뮤니케이션 마저 최고 주가 때 5조원이었던 시가총액이 2000년 말 1800억대로 주저앉을 정도였다.
이번은 예외일까?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과거와 똑같은 길을 걷는다 이번이 세 번째다. 지금 진행과정은 2000년보다 더 황당한 것 같다. 2000년 당시에는 화상 통화를 내용으로 하는 IMT-2000 이나 인간 유전자 지도와 관련한 지놈 프로젝트 같은 얘기 거리라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 기술적 부분이 중소형주가를 끌고 가는 힘인지 모르겠다. 현재 상황이라면 ‘95년과 같이 불분명한 실체를 붙들고 수급과 투기에 의존해 주가를 끌어올리는 형태의 재판이 될 수 밖에 없다. 바이오 산업만 해도 그렇다. 최근 주가가 가장 많이 오른 업종이며, 코스닥 주가를 700까지 끌어올린 주역이다. 그동안 성장성이 바이오 산업을 끌고 오는 동력이었다. 그렇다 보니 주가가 오를 때마다 문제됐던 부분이 있다. 영업 성적은 적자를 면치 못하는데 어떻게 시가총액이 몇 조까지 늘어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미래에 많은 돈을 벌거란 말로 이런 우려를 막아 왔지만, 이제 더 이상 통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 상황을 넘지 못하면 주가가 인터넷 기업과 같은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인터넷 기업들이 나스닥 시장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게 ‘96년이다. 2년이 지난 ‘98년부터 테마를 형성하더니, ‘99년에 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우리나라는 나스닥보다 1년 늦은 ‘99년말부터 본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전자상거래 같이 확실한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대상이었다. 인터넷 산업이 유치한 단계여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를 지나 인터넷이 주식시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대상 기업이 늘어나고, 주가가 급등했다. 투자 기준은 여전히 기업 내용보다 성장 가능성에 맞춰졌는데, 관련 기업들의 이익이 미미해 이익만으로는 주가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장성이 강조될수록 버블이 커졌고, 결국 가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주가가 크게 하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버블이 터진 후 옥석을 가리는 과정이 있었다. 주가가 기업 내용에 부합하는지는 물론 생존 가능성이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구분해, 능력이 안되는 기업은 솎아내기 시작했다. 현재 시장에서 인터넷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회사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살아 남은 곳들이다. 많은 이익과 높은 주가를 유지하고 있는데, 도태된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영업 공간을 차지해 수익력이 높아진 덕분이다. 인터넷이 겪었던 버블 형성, 붕괴, 선별과 도태 과정은 다른 산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철도 산업이 그랬고, 자동차, 라디오도 발달 과정에 늘어난 참여 기업을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다. 주식시장에서 중소형주를 대신할 대안이 아직 없다는 점, 2년 가까이 상승의 중심에 있던 관계로 여전히 투자자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점, ‘97년과 2000년 중소형주 급락은 외환위기와 IT버블 붕괴라는 재료가 있었던 반면 지금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장 중소형주가 급락할 것 같진 않다. 3분기까지는 빠른 순환매와 핵심주와 비핵심주를 가리는 작업이 진행될 거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마냥 계속될 순 없다. 이번 상승이 끝나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과정이 나타날 것이다. 이 과정에 상당수 중소형주 주가가 크게 하락할 수 있다. 화장품, 바이오 같이 시장의 관심을 모으면서 급등했던 종목들은 20년 후에도 현재의 고점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15년 전인 2000년에 SK텔레콤이 53만원으로 고점을 친 후 현재 당시 가격의 절반에 머물고 있는 걸 보면 가능성이 없다고 얘기할 수 없다. 언제 중소형주에 대한 투자를 거둬들일 건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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