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이율곡을 길러낸 사임당(師任堂) 신씨
조선의 과거제도는 기본적으로 소과라고도 불리는 생진과와 문과(=대과), 무과, 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다. 이중에서 문관 등용 시험인 문과는 크게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뉘어지며, 이들 시험은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여 3년에 1차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초급 문관 시험인 소과에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가 있었고 이를 생진과(生進科)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다. 이 시험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었고 여기에 합격한 자를 초시 그리고 생원, 진사라 불렀다. 생원과 진사는 큰 차이가 없긴 하였지만, 대체적인 사회풍토상 진사과 합격자가 보다 우대를 받았다. 이 소과의 특징은 바로 관직을 부여 받는것이 아니라,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거나,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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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기 1548년 조선 명종때도 어느때와 다름없이 진사시험을 치루고 있었다. 비록 임용자격 시험이긴 하였지만, 조선시대 문관직은 양반들이 매우 선호하는 직업이었고, 집안에 별다른 배경이 없는 사람은 시험이 아니고서는 출세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이 진사시험의 경쟁비율도 대단히 높아 몇번씩이나 낙방하는 예도 수없이 많았고, 평생 합격하지 못하거나 진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마을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진사시험의 장원급제를 발표하는 순간 모두 놀라고 말았다. 겨우 13살의 소년이 장원급제 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율곡...조선 중기 최고의 천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율곡의 합격소식을 듣고서도, 신사임당은 기쁨을 감추었다. 그리고 더욱 엄격한 가르침으로 인격과 소양을 닥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도록하였다. |
조선시대 과거시험과목은 사서삼경등을 비롯한 유교경전에서 주로 출제되었다. 따라서 진사시험정도는 완벽하게 암기만 하면 되었고, 이미 7살때 사서삼경을 모조리 암기한 이율곡으로서는, 틀에 맞추어진 정답을 적어내기에는 그리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걱정했던 점도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 일찍 학문의 외형적인 완성을 이룬탓에, 그 내면적인 깊이를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어릴때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다가, 스스로의 자만심이나 주위에서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 커서는 그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사임당 신씨는 이 율곡에게 내면적인 수양에도 조금도 소흘함이 없도록 엄격한 훈육을 실시하였으며, 이 율곡역시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완성에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3년마다 보는 과거가 돌아오는 해인 1551년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돌아갔기에,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따라서 열세살이었던 소년은 6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19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왠만한 유교서적을 암기한 이율곡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다. 시대의 천재에게도 사춘기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3년간의 시묘살이는 당시 양반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사회풍습이었기 때문에, 열 아홉이 되어서야 이율곡은 자기 자신의 세계를 찾기 위한 방황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1554년 시묘살이가 끝나던 해 또한명의 성리학 대가였던 성혼(成渾)과 함께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도 하며, 끊없이 학문적 탐구를 하였지만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먼 불교학문에 뜻을 둘 수가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학문은 실존철학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현실에서도 적용하고 발휘되어 실제로도 편리과 행복이 이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했다. 따라서 1555년 하산하여 또다시 유학에 매진, 점차 그의 독창적인 철학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 이율곡도 딱한번 과거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적이 있다. 바로 1558년(명종 13년) 23세 때, 율곡에게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 라고 하였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는 아무쪼록 힘을 쓰게나."
이렇게 율곡 이이가 시험에 떨어진 이유는 한동안 불교학문에 매진하고 방황도 하였던 탓에, 과거시험제가 추구하는 논술형태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답안을 제출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율곡 이이가 누구인가? 이율곡은 그해 벌어진 특별시에서 하늘의 도리를 묻는 문안에 대해 천도책이란 답안을 제출하여, 다시한번 장원급제를 하였다. 문과의 경우에는 그 단계가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로 나누어진다. 이 율곡이 이해 장원급제한 특별시는 중앙에서 치루어지는 생진초시를 볼 수 있는 특별체용시험에 해당한다. 아무튼 이 특별시에서 합격하였다 하여도 다음 초시를 보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이율곡에게는 또다시 불운이 찾아왔다.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과거시험을 놓쳤던 이율곡은,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또다시 시험기간을 늦추어야만 했다. 즉 23세 때 이미 초시를 치를 자격을 획득하였지만, 초시를 치른것은 아버지의 3년 시묘살이가 끝나는 29세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29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중앙관직 체용시험인 생진초시와 복시를 보게된다. 하지만 23세 때 지은 천도책은 600년 역사의 과거시험답안 중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힐만큼 우수한 것이었다. 그는 29세에 본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삼장 장원(三場狀元)'으로 불렸다. 또 그 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이어 진사시(進士試)에 고등으로 합격하였으며, 문과에도 모두 장원을 하니, 대개 전후에 장원을 차지한 것이 모두 아홉 번이었으므로 당시에 '구장 장원(九場壯元), 구도 장원(九度壯元)'이라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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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종류 |
시험회수 |
시행 년수 |
해당 율곡의 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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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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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과(小科) |
생원과(生員科) |
초시(初試) |
3년마다 한번 (式年制) |
29세 장원(명종 19년1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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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시(覆試) |
29세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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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과(進士科) |
초시(初試) |
29세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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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시(覆試) |
29세 합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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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과(大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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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시(初試) |
3년마다 한번 (式年制) |
29세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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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시(覆試) |
29세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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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殿試) |
29세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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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 (特別試)
소과 |
별시(別試)
진사과(進士科) |
초시(初試)
초시(初試) |
국가에 경사가 있을때
3년마다 한번 (式年制)
동일 |
23세 장원(명종13년1558)
21세 장원(명종 11년 1556) -한성시
13세장원(명종 3년 1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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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과거시험기간과 부모의 조상이 묘하게 겹치는 불운 속에서도 9차에 걸친 수석합격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그 뒷면에는 어머니의 깊은 가르침이 있었다.
사임당 신씨는 가정교육과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자칫 자만과 독단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율곡 이이에게 엄격한 훈육을 통해 참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비록 율곡의 나이 열 여섯이 되던해 세상을 떠나기는 하였지만, 교육학적으로 볼 때도 태어나서 사춘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가, 인성이형성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 사임당 신씨는 재능에 만족하는 게으른 천재보다는, 끊없이 노력하고 학문을 갈고 닦으며, 지극히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향해 그 재능을 펼칠수 있도록 율곡에게 각별한 애정과 함께 엄격한 훈육을 동시에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스무살 전후에 시작한 방황 속에서도 율곡은 그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결국 세상속으로 나와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바뀌게 하는 혁신적인 정치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가 율곡 이이를 성현으로 추앙하는 것 이상으로, 사임당 신씨를 우리들의 어머니상으로 받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간혹 사임당 신씨를 현모양처라 하여 이 시대상과는 맞지않은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여성단체도 있긴 하지만, 사임당 신씨는 유교적 질서가 극에 달했던 조선중기에서도 조충도를 비롯한 뛰어난 미술작품을 다수 남겼는등 여류화가로서의 돋보적인 위치를 차지함은 의심할 바 없다.
더구나 인격 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교육자로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아홉번의 장원급제, 그리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리우는 천재 이율곡...그러한 찬사속에서도 겸손과 학문정진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위한 현실의 정치를 한 이율곡...그 뒷면에는 한국인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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