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이 가져 본 가장 큰돈...그런데 목표가 없다667조 원! 국민연금의 올해 2월 말 현재 적립금이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이 약 400조 원대이니까 아마도 대한민국이 단군 이래 쥐어보는 가장 큰돈이 아닐까 한다. 4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이 돈은 2041년 1,778조 원까지 불어났다가 이후 급격하게 줄어들어 2057년 고갈되는 것으로 예상됐다. 지금 국민연금 개편 논의의 핵심은 제도(보험료와 소득대체율 등)를 손질해 이 적립금이 너무 급격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연착륙시키는 일, 그래서 세대 간 연금의 혜택과 의무를 비슷하게 나누는 일이다.
- 기금 고갈 3년 앞당겨진 이유 중 2년은 기금운용수익률 때문문제는 연금 개편의 논의가 제도 손질에만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연기금 적립금이 600조 원을 넘은 상황에서 연금 개편의 두 축은 제도와 기금운용인데, 사회적 논의가 제도 개편에만 집중돼 있고 기금운용은 5년짜리 전략이 전부다. 장기적인 목표도 없다. 지난 4차 재정추계 결과로 연기금 고갈 시점은 2060년에서 2057년으로 3년 앞당겨졌다. 하지만 3년이 앞당겨진 이유 중 2년은 기금운용수익률 전망치 하락이었다. 연금 문제의 핵심으로 알려져 있는 저출산 고령화 등 인구변수는 오히려 6개월 미만의 영향만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고나 할까? 연기금의 안정성이 보험료와 소득대체율 뿐 아니라 기금운용 능력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게 국민연금의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스스로 장기재정목표나 전략이 없이 운용되고 있다고 자체 보고서를 통해 밝히고 있다.
- 667조 원의 주인은? 부과식 vs 적립식667조 원의 주인은 누구인가?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돈의 주인이 쓰임새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하려면 우리 국민연금 제도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정확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을 '부분적립식'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연금제도가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분적립식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서는 연금제도 개편이나 기금운용의 목표를 세우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민연금이란 제도의 근간이 적립식인지 부과식인지를 명확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만약 국민연금이 적립식이라면 667조 원의 주인은 돈을 낸 사람, 즉 현세대다. 이때 기금운용 전략은 '수익률 제고를 최고의 가치'로 둬야 한다. 기금운용본부는 사적보험사들처럼 국민이 맡긴 돈을 최대한 잘 굴려서 돌려줘야 하는 게 사명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장을 떠나서 해외시장으로 진출하고, 부동산·금·원유 등 다양한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반면 국민연금이 부과식이라면 667조 원의 주인은 미래세대다. 현세대는 은퇴 후 약속한 급여만 제대로 나온다면 연기금이 늘어나든 고갈이 되든 상관이 없다. 미래세대가 튼튼하게 경제활동을 해서 연금보험료를 잘 내주기만 기도하면 된다. 이때 기금운용 전략은 '수익률 외에 또 다른 가치, 즉 미래세대의 경제력을 강화하는 투자'를 해야 한다. 일자리를 늘리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의 주인인 젊은 미래세대가 원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지금껏 연금을 취재하면서 국민연금을 순수 적립식이라고 얘기하는 학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 학자들은 부분적립식을 이해하면서도 제도의 작동 원리는 부과식이라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연금 제도는 부과식에 가깝다는 건데 기금운용방식은 적립식인 것처럼 투자되고 있다면 이 또한 모순일 것이다. 특히 지금의 연기금 운용 방식은 장래 자산을 매도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러 한국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코위츠 포트폴리오 이론': 199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해리 마코위츠 교수가 제시한 것으로 자산을 분산투자하면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쉽게 얘기하면 안전하게 주식 투자하려면 분산해서 투자하라는 이론이다. 금융계에서 가장 기본인 투자 원칙 중 하나다.
'자산 멜팅 다운(Melting down)' : 2040년 전후 국민연금이 가진 자산을 매각할 때 유동화가 힘들어 큰 자산가치 하락이 예상되는 시나리오. 금융시장도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연관 기사] ‘우물 안 고래’ 국민연금, 국내증시 시한폭탄'수익성과 안정성': 이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킨다는 게 매우 어려운 명제이나 그래도 지난 30여 년 동안 국민연금을 지탱해온 기금운용의 으뜸 원칙이다.
이론적으로 4차 재정추계 대로라면 국민연금의 자산 멜팅 다운 시기는 2040년대 발생한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재정추계를 시장의 모든 사람이 아는 상황이라 '멜팅 다운'의 실제 시작은 2030년 중반부터 나타날 수 있다. 국민연금이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멜팅 다운'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재정추계는 5년에 한 번 한다. 따라서 서둘러 자산배분전략을 새로 짜지 않으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이 크게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대한 국민연금 주식회사'...연금사회주의 vs 백기사최근 한진 사태를 지켜보면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 십 코드 정책을 놓고 '연금사회주의'라는 비판이 재계에서 나왔다. 그만큼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 영향력이 높다는 건데 어는 정도일까?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기업은 286개(10% 이상 지분은 97개.2018년 말 기준). 시가총액 상위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대기업은 물론이고 이름을 들어서 알만한 한국 기업 대부분에서 국민연금은 대주주다. 국내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재벌 그룹의 총수보다 국민연금 지분이 훨씬 크다. 순환출자 등으로 확보된 총수 우호지분이 없다면 사실상 국내 최고 기업들의 단일 최대주주는 대부분 국민연금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들여다보면 이런 대기업 총수들에게 국민연금은 천군만마였다. 오랜 기간 경영에 별 간섭도 하지 않으면서도 쥐꼬리만 한 배당에 만족해 준 대주주가 바로 국민연금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은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50%를 넘나들고 있다. 국민연금은 세습을 이어오면서 경영권 확보에 비상이 걸린 국내 재벌 총수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재용 씨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면서 제일 먼저 불법적인 부탁을 한 곳이 국민연금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이 '재벌 백기사'란 비판 속에서도 이 같은 투자를 지속해온 이유는 있다. 최소한 국내투자 내에서만 놓고 보면 국민연금은 '패시브(주식시장 비율과 같은 비중으로 투자)' 전략을 썼고 이는 마코위츠가 얘기하는 포트폴리오 이론, 즉 분산투자의 원칙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또 지금까지 줄곧 한국경제의 중심이었던 대기업 주식을 많이 보유하는 것이 성장의 과실을 나누며 '수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좋은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수익성과 안정성'만을 놓고 볼 때 한국 증시의 미래는 매력적이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 KDI는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현재 수준을 유지한다면 2020년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일시적인 침체가 아니라 추세적 하락이라고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향후 5% 안팎의 수익률을 목표로 국내 주식에 계속 투자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멜팅 다운'의 우려를 잠재우는 숙제도 남아 있다.
만약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 비중을 줄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내 재벌기업 총수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성과 안정성'의 원칙을 지킨다면 국민연금은 국내주식 비중을 적정 수준으로 낮춰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재계가 국민연금에게 '연금사회주의'라는 주장을 한다는 건 마치 '최대주주에게 개미투자자처럼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로 전혀 경제적 논리에 맞지 않다.
국민연금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지금껏 5년짜리 자산배분전략을 짜왔던 기금운용위원회가 이런 난제를 해결할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지도 분명하지 않다. 국민연금과 관련해 오랜만에 만들어진 사회적 기구인 경사노위가 기금운용의 새 방향에 대해서도 물꼬를 터주길 기대한다. 아니면 최소한 적립금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의견이라도 들어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