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 (서프라이즈 / 바다의집 / 2008-12-2)
좋은 영화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방법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영화의 원작 '눈먼 자들의 도시(1997년작)'의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1922년~ )'는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스토리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컨텐츠의 거대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그러나 화법에서부터 문장부호까지 절제할 줄 아는 포르투갈이 낳은 걸출한 작가다. '인간의 조건 3부작'의 시작이 된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영화로서의 실패를 보고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바로 지금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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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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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
'눈먼 자들의 도시'로 시작한 '인간의 조건 3부작'의 완결판 '눈뜬 자들의 도시'에 대하여 작가는 "하나의 발길질로, 분노와 저항의 표현으로 썼다."며 권력이 가진 폭력적 속성과 기성세대를 향해 혁명을 통한 낙원 만들기를 포기한 젊은이들이 결국 선택한 순수자기중심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특히 대안 없이 힘으로 지배해왔던 서구의 경제적 세계통합에 저항하고 있다.
영화보다는 소설이 출중함은 따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문에 필자는 구태여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사실 영화로 흥행성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눈뜬 자들의 도시'가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장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옆에 앉은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의 이마에 키스하는 것을 보며 이는 감독 개인의 존경심에서 시작 또는 종결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쨌든 영화와 소설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대신 세 가지 이 소설(혹은 영화)의 특징을 말하려 한다.
첫째, 소설 속 인물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음은 이름조차 그가 하는 직무에 귀속되고 만다. 의사, 의사의 아내, (바텐더 출신의)총을 가진 사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등등. 왜인가? 그것은 이미 당신도 눈이 먼 자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가는 독자들 모두에게 "당신들은 눈이 멀었어, 하니 이름 따위가 뭐에 중요하겠나?"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소설에도 이러한 방식과 비슷하게 등장인물에 이름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름을 지어 부르던 모든 것은 어느 순간 그것이 기능하는 것만이 남게 되고 그것이 중요해짐을 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기능의 존재조차 삭제하기를 희망하는 듯하다. 모두가 눈이 먼 도시에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 도시의 사람들 머리 위로 비가 쏟아지자 벌거벗은 채 사람들이 행복한 샤워를 한다. 이 무리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패션디자이너였을 수 있으며, 누군가는 교양을 강좌하는 교수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상관없다. 그의 이름과 그의 기능은…
둘째, 눈이 하얗게 먼다는 것이다.
눈이 먼다는 것은 곧 어둠만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즉, 볼 수 없음은 까맣게 세상이 보인다는 것인데 이들은 하얗게 눈이 먼다. 온통 하얗게 보일 뿐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될 것이나, 그보다는 분명히 보고 있으나 외면하고 있는 순수자기중심의 인간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먼 자의 총을 두려움으로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을 깨닫는 순간 유일하게 당신은 세상에 눈뜬 자가 될 수 있음이다. 바로 '의사의 아내'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조차 식량을 배급 받기 위해 눈이 먼 그러나 총을 가진 사내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다. 그리고 그의 남편 의사는 이에(매춘 행위) 동의한다. 무엇인가? 진정 우리가 보고 있어야 할 것과 보고 있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작가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눈먼 자들 속에 당신이 홀로 눈을 뜨고 있다면?
그것은 의사의 아내가 겪었던 그것 즉, 사람들 중에 유일한 고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이러한 경험을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무지와, 무지성과, 자기중심과, 권력과, 경험적 폐쇄성 등을 가진 무리 속에서 말이다. 그 무리 속에 홀로 눈을 뜨고 있는 자의 고통은 그 무리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정비례하게 마련이다. 만일 모두가 눈먼 도시에 홀로 눈을 뜬 자기중심적 인간이 하나 있다면 그는 제 3병동의 대장보다 더 극악한 권력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즉시 군부대로 차를 몰고가 수류탄과 M16을 들고 나타나 세상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환희에 찬 새 삶의 시작이다. 그에게 절망이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기에….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중심적이면 얼마나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인지 작가는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두려워해야 할 주체와 그들이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가?
어찌하여 DJ는 대선을 앞두고 스마일 전략을 펼쳤으며, 날카롭고 매섭던 유시민의 비판은 사라진 것일까? 이해찬, 한명숙,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어찌하여 이 눈먼 도시에 사람들과 권력자들에게 침묵하는가?
백지투표….
지금의 눈먼 도시 대한민국에 당신은 분노가 치미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이 도시를 사랑하고 있으며 눈이 먼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무기를 탈취하러 갈 것인가? 하지만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더 큰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자, 이제 눈뜬 자들의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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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부터 도시의 사람들이 눈을 뜰 때까지 당신 주변과 이웃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들이 살아갈 희망을 이야기 하고, 그들의 위생을 위해 주변을 청소해야 하며 먹을 것을 구해와야 한다. 그들이 살아야 또한 당신의 미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
'눈먼 자들의 도시'의 공포보다 무서운 것은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의 백지투표 용지였다. 권력자들의 공포심이 자극된 것이다. 만일 눈뜬 자들이 기권해 버렸다면 결코 공포스러울 것 없었지만 모두가 선거에 참여해 백지투표를 함으로써 권력자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제 당신은 인내심으로 백지투표 할 준비가 되었는가?
책의 마지막에서 의사의 아내와 의사가 대화한다.
아내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의사 :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아내 :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영화의 마지막에 의사의 아내는 독백한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던 동안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리고 눈이 멀지 않았던 나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당신은 지금 무엇을 깨닫고 있으며, 훗날 지금으로부터 무엇을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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