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씨름대회 5연속 우승 후 고시 준비중인 서울 법학부생 김영태 “보디빌더들도 저한테 안 되죠. 팔씨름도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100kg이 넘는 씨름선수, 유도선수, 보디빌더들도 그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몸집으로 보면 그가 작은 듯해도 팔씨름으로는
그에게 적수가 안 되는 것. 현란한(?) 기술을 바탕으로 팔씨름대회 5연속 우승을 거머쥔 서울 법대생 김영태씨를 만났다.
야구선수, 팔씨름선수로 전직
김영태씨(25)는 중학생 때까지 잘나가는 야구선수였다. 초등학교 3학년때 시작한 야구는 그의 전부였을 정도. 현재 메이저 리그
에 진출한 봉중근 선수와는 중학생 때 같은 그라운드에서 뛰기도 했다. 그가 속해 있던 서울 선일중학교 야구부 선수들은 ‘짱짱’
했다. 당시 중학교 야구 시합은 모두 선일중학교가 석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태씨는 유격수와 2루수로 번갈아가며 활약했
고, 전도유망한 2번 타자였다. 그는 여러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당시 (봉)중근이는 투수도 잘했지만 타자로서도 뛰어난 선수였어요. 투수와 타자 중에 어느 것을 해야 할지 고민할 정도였죠.”
김영태씨는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몸이 전과 같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운동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쉬는 시
간에도 야구만 생각했을 정도로 야구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의 근육들은 점차 마모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습중 슬라
이딩을 잘못해서 어깨 근육이 파열됐다. 곧바로 재활 치료만 잘 받으면 대학 입학은 무난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이었다.
“제 몸 상태를 숨기고 야구부 생활을 계속하든지, 야구를 그만두던지 선택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제 자신을 속이기 싫더라구요.
재활 치료를 잘 받아서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겠지만, 그후가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포기했죠.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4개월 만이었다. 인생의 진로를 바꾼 그는 하루라도 빨리 자립을 해야 했다. 중학교 3년 과정 동안 그가
배운 것은 야구밖에 없는데, ‘공부로 친구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답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모험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중3 때 담임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말까지 운동을 하다가 부상 때문에 그만두고 공부
를 시작해 선생님이 된 분이다. 그는 선생님을 떠올리며 자신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후 김영태씨 인생의 그라운드는 야구장에서 교실로 바뀌었다. 뛰고, 달리고, 공을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실에서도 엄연히
생존경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교실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 시간, 자투리 시간 등 모든 시간을 책에 파묻
혀 살았다. 친구들이 한 시간 동안 공부하면 될 것을 그는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영어와 수학은 전혀 기본이 안 잡히더라구요. 길을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타고 가면서도 제 손에서는 책이 떠날 줄
을 몰랐어요. 그런데 운동만 하던 제가 어느 날부터 책만 파고드는 모습이 친구들한테는 우습게 보였나 봐요. 저를 좀 괴롭히더
라구요.”
쉬는 시간마다 힘 좀 쓰는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온 것. ‘싸우기는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그는 ‘팔씨름’을 생각
해냈다. 운동을 계속해온 몸이다 보니 친구들은 그의 팔 힘에 맥을 못 추고 픽픽 넘어갔다. 승부를 결정짓는 데는 1초도 안 걸렸다.
그는 팔씨름으로 반을 평정(?)하고, 학년을 평정하고, 나중에는 학교 전체를 평정했다. 그러고 나자 그에게 시비를 거는 친구들이
사라졌다. 팔씨름 하나로 그는 학교 ‘짱’이 됐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팔씨름으로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던
친구들은 지금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나의 목표는 서울 법대 그리고 검사
김영태씨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목표를 정했다. 검사가 되는 것. 검사가 되면 사회악을 뿌리 뽑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도 최고를 생각했다. 그가 악착같이 운동을 한 것처럼, 공부도 열심히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서울대 법학부에 진학하
고 싶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동할 때 아낌없이 지원해준 부모님은 아
들이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도 믿어주셨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성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고3 때는 상위 3%의 성적까지 나왔다. 대학 입학원서를 접수할
때 그는 재수를 결심하고, 서울대 법학부에 지원했다. 담임선생님도 반대했지만, 그의 고집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첫술에 배
부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재수를 하면서 성적을 상위 1.5%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서울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과감히 진학을 포기했다.
그는 오로지 서울대 법학부가 목표였으니까. 드디어 삼수 끝에 그렇게 가고 싶던 대학에 합격을 했다. 성적은 상위 0.04%에 드는 396점.
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운동을 하던 학생이 서울대 법학부에 입학했다고 다들 신기한
듯 수근거린 것. 그리고 단국대 야구 동아리에서 그를 불렀고, 그는 아마추어 선수들 앞에서 화려하던 선수 시절 솜씨를 보여줬다.
그러자 단국대 야구부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3학년이 되어서야 단국대 야구부에서 서울대 야구부로 적을 옮
길 수 있었다. 서울대 야구부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1승을 한 것도 그가 동참한 후였다.
김영태씨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팔씨름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서울대 축제에는 팔씨름대회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팔씨름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2003년에 처음 전국팔씨름대회에 참가했다.

두번째 참가 대회부터 팔씨름 왕
호각이 울리기 전 몇 초가 중요하다. 상대의 손을 꽉 잡으면서 힘을 어느 정도 줘야 하는지, 몸의 각도는 어떻게 틀어야 하는 지
등 실력을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모든 것을 준비한
상태에서 호각이 울리면 대부분 1초 안에 승부가 결정된다. 그의 현란한(?) 팔씨름 기술 앞에 100kg이 넘는 보디빌더들도 맥을
못 춘다.
난다 긴다 하는 전국의 팔씨름 선수들. 전국팔씨름대회에 출전할 정도면 평생 팔씨름으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
부분일 것이다. 2003년 9월 울산 MBC에서 개최한 대회에 처음 출전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처럼 별 준비가 없었다. 첫 게임
에는 승리했지만, 두번째 게임에서는 졌다. 순간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팔씨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팔씨름이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잔기술 하나로 승부가 결정돼요. 친구들과 팔씨름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 다양한 기술들
이 눈에 띄더라구요. 팔을 꺾는 방법, 몸의 자세 등등.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결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손의 각도, 다리의 모양,
허리의 위치, 몸의 각도 등 미세한 차이가 팔씨름의 승부를 결정짓죠.”
그는 2004년 테크노마트배 전국팔씨름대회 대학부에 참가해 우승을 했다. 그리고 그해 5월 하이서울페스티벌 팔씨름대회 대학
부에서 우승, 같은 해 7월에는 경포해수욕장 팔씨름대회 일반부 우승, 8월에는 수안보온천 팔씨름대회 일반부에서 우승했다. 그
리고 지난 5월에는 남해마늘축제 팔씨름대회 우승까지 김영태씨는 5회 연속으로 전국팔씨름대회 우승을 거머쥐는 기록을 세웠
다. 승부도 대부분 2:0으로 결정이 날 만큼 그의 실력은 탁월했다.
김영태씨는 ‘2회 우승도 힘든데, 5회 연속 우승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고시 준비를 하는 대학생’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
을 놀라게 했다. 특히 전국의 법학과 대학생들이 가장 놀랐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남해팔씨름대회를 끝으로 당분간 팔씨름대회 출전은 중단할 작정이다. 내년 2월에 있을 고시 준비를 위해서다.
내년 시험에서 1차 합격을 하고, 이듬해에 2차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의 목표. 김영태씨는 고시에 합격한 후 팔씨름대회에 나가
도 지금처럼 이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고 한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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