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첫 장면은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으로 시작한다.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며 니 마음뿐이다"
그냥 이 영화를 평범하게 본다면 주된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김영철의 여자에게 맘을 품은 이병헌. 배신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보스를 속이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영철은 질투심에 불타 책임을 물어 죽이려다 실패하고 이병헌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김영철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무수한 총질과 시체들이 만들어지고 결국 마음속의 그녀를 떠올리며 죽어가는 이병헌.
하지만 단순히 이런 줄거리로만 영화를 보면 그저 조폭 버전 "아내의 유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다 다른 관점, 다른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을듯 하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은 자신이 중점을 두는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느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두 주인공의 입장에서 - 남자 vs 남자의 관점에서 -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면 그들 개개인의 입장이나 행동도 다시 보게 되고 처음과 끝의 선문답의 의미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기존과 달리 색다른 느낌으로 영화의 내용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김영철과 이병헌 두 사람이 스토리의 큰 줄기다. 신민아, 황정민, 김뢰하, 등등의 다른 조연들은 그저 곁가지일뿐. 이 두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이해해보자.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보스. 김영철
김영철이 보스들의 모임에서 과거 일화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작은 잘못을 한 부하가 보스의 꾸지람에 변명으로 일관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더라. 그건 결과적으로 보스의 권위를 무시한 행동이었고 결국 한쪽 손목이 날아갔다" 는 이야기.
권위와 권위주의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얘기다. 권위는 조직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권위주의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과연 보스의 질책에 변명하는 부하때문에 권위가 실추될까? 겨우 그런 일로 실추되는 권위라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 권위는 사라지고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지 않을까 겁내는 보스만 있을 뿐이다.
"존경받는 왕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라는 격언이 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왕이라는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야 할 정도면 이미 왕으로서의 권위는 추락한지 오래라는 뜻이다. 김영철은 권위가 떨어져 부하들에게 얕보일까 두려워하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보스였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김영철의 입장에선 이병헌이 자신의 여자에게 마음이 있었나 없었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이병헌이 자신을 속였다는 - 영화 초반 식사장면에서도 '나는 속고는 못산다'는 대사가 나온다 -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의심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병헌이 무조건 인정하고 스스로 용서를 청하기를 바랬었을 수도 있다. 그래야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권위가 보상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김영철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자는 나뭇가지 근처의 사소한 바람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배신이 확인되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릴정도로 냉정하니까. 여자가 자신을 배신한것 보다 더 견딜수 없었던건 이병헌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속이려 드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여자에게 마음을 품고 눈독을 들였다면 김영철이 가진 다른 모든것도 눈독을 들일 수 있는 것이니까.
결국 자신의 두려움과 나약함이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이다.
마지막까지 보스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 장면을 보면 문득 태조 왕건에서의 궁예와 왕건의 장면이 오버랩된다. 최수종이 연기했던 왕건은 역모를 꾸밀 마음도 없었고 물증도 없었다. 하지만 궁예 - 여기서도 김영철이 배역을 맡았다 - 는 관심법으로 왕건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단죄하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했다. 여기서 왕건이 억울함을 호소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건은 짓지도 않은 모든 죄를 시인하고 궁예에게 벌을 줄것을 청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궁예는 왕건을 용서(?)한다. 사람들 앞에서 왕건을 용서한다는 우월한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을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법을 위력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자비롭다는 인상마저 줬으니 권위와 자존심 면에서도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중에 얼마든지 왕건을 옭아맬수 있는 구실을 만든 셈이니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이다.
이병헌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 이야기를 할 기회를 준건… 궁예가 왕건에게 기대했던 심정과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결국 스스로의 열등감 혹은 자괴감을 위로받고 싶었던건 아닐까? 이병헌의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다.
보스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잠시 딴 이야기로 빠져보면……...
이런 보스를 보면 또 다시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거룩한 계보"
이 영화에서 나오는 보스는 과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줬지만 문제가 생길때마다 자신의 심복들을 희생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인물로 묘사된다. 결국 경쟁자에 밀려 조직은 와해되고 보스에게 충성했지만 배신당한 부하들 - 3명 다 죽마고우 사이다 - 에게 죽음을 당한다.
큰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자주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선다. 개인적인 선택이 아닌 조직 전체를 위한 선택이다. 누구나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틀린 길인지 알고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옳은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길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길의 반대말은 틀린 길이 아니라 쉬운 길" 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비범한 사람들은 이럴때 힘들지만 옳은 길을 선택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웅들의 삶을 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힘들지만 옳은 길을 선택했었다는 걸 종종 확인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고 영웅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보스와 조직에 버림받고 절망한 부하. 이 병헌
"왜 그랬어요? 오래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그랬어요?"
"달콤한 인생"의 유명한 대사다. 이병헌이 김영철에게 복수하기 직전에 무심한 눈빛으로,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물어보는 질문.
하지만 이병헌도 김영철이 왜 그랬는지 몰랐을리 없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자신이 하늘처럼 생각하던 보스가 실제로는 부하가 자신의 여자에게 연민을 느껴 자신을 속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라는걸.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자존심과 권위에 상처를 입을까 전전긍긍 하는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그릇밖에 안된다는걸 인정한다는게 힘들었을거다.
하지만 만약 이병헌이 보스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걸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때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말 마지막까지 복수를 결행했을까?
다만 살아남기 위해서 복수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를 보호해주던 조직에서 내쳐졌으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는 아니었을거다. 보스가 죽는다고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건 아니니까. 복수를 빌미삼아 보스를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지금의 절망과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것이다.
결국 다시 만났지만…. 서로 듣고 싶었던 말은 결국 듣지 못한다.
영화 초반 신민아를 지켜주는 그의 마음은 그저 순수한 감정이었지만 복수를 결심하고 나서 그녀의 집앞에 스탠드를 선물할때, 그리고 마지막 죽기전 전화를 걸때의 심정은 순수한 연민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끌리는 것이 아닌 위로받고 싶은 심정… 절망과 분노속에서 위로받고 싶은 이병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유리에 비춰진 모습은 주인공 자신의 심정를 주관적으로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김영철과 이병헌이 마주서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이병헌이 창문으로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를 깨닫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보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을 바라보며 무었을 생각했을까? 사실을 인정히기 힘들어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본건 아니었을까? 그제서야 보스에게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꿈"이라는걸 깨달은것은 아닐까?
마지막 이병헌의 독백에 있던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꿈"은 그저 3일을 알고 지낸 여자에 대한 애틋한 환상일수도, 7년을 충성을 다한 보스에 대한 환상일수도 있다.
이 병헌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복수를 하는것은 오히려 쉬운 길이다. 복수를 포기하고 보스를 이해하고 용서하는것이 어려운 길이었다. 보스에게도 조직에서도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보스나 조직을 버린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병헌도 결국엔 어렵지만 옳은 길 보다는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어찌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수도 있다. 결국 어떤길이든 마지막에 죽음은 피할수 없었을테니까.
죽음에 이르러서야 미련과 연민을 모두 버리고 편안한 표정이 되는 주인공
흔들리는건 바람도 나뭇가지도 아닌 그저 자신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결국 상황을 자신이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상황에 대한 인식과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것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나온 선문답의 핵심이다. 비록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P.S 1 이 영화의 리얼리티에 대해 살펴보자.
영화 초반, 이병헌과 진구가 룸에서 진상을 부리는 경쟁 조직원들과 한 판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는 저런 일은 벌어지기 힘들다고 한다. 상대 구역에 와서 진상을 부려 시비거리를 만들어내는 저런 짓은 속된말로 "가오" 가 안산다는거다. 건달들에게 "가오" 란 단순히 겉멋이 아니다. 저런 쪼잔한 짓을 하면 그대로 양아치로 찍혀 저 바닥에선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다고 한다. 시비거리를 만들때 만들더라도 저렇게 찌질하고 속보이게 하지는 않는다는거다. 어느 바닥이든 사람들의 이목이 무서운건 매한가지다.
이병헌이 룸에서 한판 액션신을 벌이는것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저런 장소와 여건에선 굳이 수고스럽게 싸울 필요도 없다는것. 가스총이나 전기충격기(스턴건)는 뒀다 뭐에 쓰냐는거다. - 이 장면에서도 진구가 가스총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 격투신은 이병헌의 멋진 액션신을 보이기 위해서 삽입된 것이지 실제 조폭들은 무식하게 아무때나 칼이나 맥주병을 들지는 않는다
대신 싸우는 디테일한 면에선 상당한 리얼리티를 보인다. 그냥 지나가는 짧은 장면이지만 차타고 가다가 시비거는 양아치들과 싸우는 장면이 있었다. 유심히 보면 이병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윗도리 단추를 잠그고 와이셔츠 소매깃을 푸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조폭들이 싸울때 넥타이를 매거나 양복을 풀어헤치면 잡혀 끌려다니며 제압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넥타이는 매지 말고 항상 윗도리 단추를 채우라고 교육받는다고 한다. 대신 동작을 편하게 하기 위해 셔츠의 소매깃은 풀어놓는다..
실전에서는 파괴력 있는 큰 동작보다는 스피디하고 상대방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이 많이 쓰인다. 눈을 찌르거나 목의 성대를 공격하는 방법. 낭심이나 흔히 말하는 쪼인트를 까는 방법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오른쪽 새끼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것만큼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드물다.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건 의외로 쉽다. 부러뜨리겠다는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일뿐. 손가락을 잡고 세게 쥐면서 비틀기만 해도 되니까. 여길 다치면 주먹을 쥐거나 무기를 잡지도 못하게 된다.
도로에서 시비거는 양아치들과의 싸움장면에서 이런 방법들이 총 동원된다. 짧지만 실전 교본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P.S 2 두 주인공 사이에 교감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들어있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쪽 손에 상처를 입고 붕대를 감은채 영화 내내 등장한다. 이 장면은 아마도 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다는점, 그리고 아직 서로 확실하게 풀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 있다는 점을 감독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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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전개가 살짝 매끄럽지 못한게 아쉽기는 했지만…. 이 두 주인공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히 비장미가 넘치는 영화였다. 꼭 과도한 액션이나 과장된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 없이도, 길고 자세한 대화 없이도 분위기와 눈빛만으로도 얼마든지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소장용으로 강추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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